배왕사(陪王寺)에서 배방사로, 일제 압제기에 결국 소실돼

성종 제위 13년, 왕은 고심한다. 국가는 최승로의 시무28조를 근간으로 위엄과 전제왕권 강화가 이루어져 안정을 갖추었다. 중앙과 지방을 망라해 관리가 파견되고 조세제도와 귀족정치의 문란함도 대대적인 개혁으로 마무리한 때였다.

즉위 원년이 떠 오른다. 경관(京官) 5품이상의 관리에게 시급한 업무를 정하여 밀봉하여 올리라 했을때 일이다. "임금의 덕은 오로지 신하의 보필에 달려 있으니 그대들은 각기 봉사를 올려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라"고 백관에게 명하였었다.

고려 황궁이 있던 개성, 기단과 터만이 남고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뒤로 송악산이 궁성을 품고 있다.

그때 신라출신의 최승로를 처음 대하였다.

"태조는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정치를 부지런히 보살폈으나 종묘와 사직의 빛을 높이지 못하였고, 혜종은 친족을 보전한 우의(友誼)는 있으나 의심이 많아 임금의 체통을 잃었고, 정종은 환난을 평정하니 지모는 밝았으나 서경천도에 고집과 독선을 부리다가 백성들의 원망만 듣게 되었고, 광종은 상과 벌을 내림에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옳고 그름이 균등했으나 나중에는 눈 밖에 난 이들을 무참히 참소하는 폭정을 하였고, 경종은 광종시대의 억울한 죄수 수천명을 방면할 정도로 관대하였으나 정치를 알지 못해 권신들에 의해 휘둘렀다"

거침없는 선비의 기개였다. 선대 왕의 이른바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의 상서문이었다. 그의 의견을 대거 받아 들여 시무28조의 정책으로 유학을 통치근간으로 세워 비록  태조의 훈요10조를 따르지 못하더라도 백성에게 어진 어버이로서 바른 통치는 해 왔다고 느껴 왔다. 

헌애왕후 주변을 얼쩡거리는 김치양도 유배를 보냈고 왕실의 혼란도 마무리 했다. 그럼에도 막연한 근심은 지울길이 없다.  자신의 후사를 이을 적통이 없었다. 이대로 라면  나이 어린 개령군(후의 목종)에게 고려의 운명이은 넘어 갈 것이고 헌애왕후의 야먕으로 보아 이같은 고려왕권의 위엄도 사상누각으로 스러질것이 뻔한 일이었다.

숙부 왕욱을 유배 보낸지도 2년이 넘었다. 마음같아서는 유배 해제를 명하고 싶지만 조용한 황궁에 풍파를 던지게 될것이기에 더욱 어렵다. 그를 불러들인다는 것은 후계구도를 두고 조정이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기에 말이다.

왕은 조카이자, 왕실의 계통으로 태조의 친손이 되는 자신과 같은 반열인, 순을 만나러 간다. 태어나자 마자 어미를 잃고 보모의 젖을 먹고 자란 조카 순은 제법 아장 아장 걷는다.  옹아리 같은 말속에 자신을 '아버지'라 부른다. 왕은 결정을 내린다.

아비에게 보내서 부자 상봉은 허락하되 동거는 불허한체 이웃한 노곡사에서 기르도록 명한다. 귀향의 애타는 마음을 아들이라도 볼 수 있게 허용함으로 숙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한 셈이다.

노곡사에서 생애 처음 자신의 후사이자 헌정왕후와의 소생인 왕순을 안아 본다. 아들을 자신의 폄소(貶所)로 보내준 성은에 목이 메이고, 한편으로 살아서는 개경땅을 밟을 수 없다는 상징성에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욱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경험을 하루빨리 순에게 전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석축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서 이곳이 잠룡이 우거한 노곡사임을 전하고 있다

노곡사는 사수현 동편으로 지금의 정동면 대산부락의 안골에 있었다. 표주박과 닮은 지형에서 유래하여 노곡사였으나 후에 잠룡시절, 왕순이 우거한 계기로 배왕사(陪王寺)로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배방사(排房寺)로 전락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돌로 쪼아 만든 나한상(羅漢像)과 샘의 두껑돌 그리고 고려청자편과 기와조각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단다.노곡사는 일제강점기에 폐사지되고 지금은 야생녹차와 절터 만이 전해 온다.

왕순은 고승(高僧)을 스승으로 일찍부터 글을 배웠다. 아버지로부터 태조 왕건의 손자로서,  여느 아이들과는 지체가 다르다는 것만은 어슴프레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총명하여 남다른 데가 있었으며 아버지 생전에 아제시(兒題詩)를 지어 바칠 정도였다. 잠룡으로서의 기운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 한편을 소개한다.

          小小蛇兒繞藥欄       작고 작은 새끼 뱀 약포 칸에 올랐으니
          滿身紅錦白班爛       온 몸에 붉은 비단 휘감아 흰반점도 눈부셔라
          莫言長在花林下       꽃나무 수풀 속에 살거라고 막말 말게
          一日成龍也不難       날이 차면 용이 되어 하늘 오름도 어렵지 않으리

왕손으로서 기풍과 아버지로부터 왕통의 교육이 묻어 나는 글이다. 왕욱이 996년 세상을 떠나니 5살의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다. 어린 왕손으로서 태어나며 어미를 잃고 5세에 아비를 잃은 상주의 몸이 되니 그 시련이야 오죽했으랴 마는 불가의 가르침과 왕손으로서의 강직함으로 꿋꿋하게 성장해 간다.

왕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신을 엎어 묻었다. 아버지가 남기고간 금화 한주머니를 지관에게 주며 아버지의 유언대로 집행했다. 어린 왕손은 할아버지의 유지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사수강토를 누비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나갔다.

천금산에 올라 쇠평들을 휘감아 용처럼 흘러 내리는 강물울 보며 저 강처럼 나도 예성강을 휘감아 올라 룡이 되겠다는 마음을 잠시라도 놓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능화봉이 그리워 고자실을 지나 니구산에 오르며 자식을 그리워했던 마음처럼 수십번을 올랐을 고자치, 한달음에 서낭산성까지 이내 달려 두류산을 바라보며 천왕의 기운을 빌어 고려조의 강성함을 기도했겠다.

서낭산성의 항공사진, 산성의 남쪽, 현종의 아버지 욱의 유배지 귀룡동 그너머 와룡산 자락이 보인다. (구글어스 제공)

삼한갑찰 와룡사에서 궤불도를 보았다. 존귀한 부처의 영험함이 묻어나는 탱화 속에서 미래의 왕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오늘에 전해 온다.

                他時若得 風雲氣           다른 때에 바람과 구름의 기운을 얻는다면
                白日昇天 也不難           백일승천함이 무에 그리 어려우랴

잠룡으로 노곡사에 우거한지 10년, 왕손으로서 기개와 승가생활의 참선이 몸에 베여, 어느듯 12세의 늠름한 소년이 된다. 여러차례 왕경 개경에서의 봉군칙령을 피해 왔으나 왕도의 완성을 보았음인가 1003년 우거한 사수현을 떠나 개경으로 향한다. 대량원군, 목종의 즉위에 따른 예비왕통으로서의 지위이자 고려조의 공식적인 왕자로서 봉책되어 개경으로 10년만에 귀향한다.

노곡사는 배왕사로, 배왕사는 다시 배방사로... 지금은 정동황차로 야생차 제다실이 들어서 세월의 하수상함을 느끼게 한다.

언효 효질, 부모처럼 가까이 지켜주었던 고마운 사람을 뒤로하고,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을 길러준 풍패의 땅, 사수를 어린 잠룡은 잊지 않으리라고 굳게 약속하며 개경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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