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박연묵교육박물관이 품은 이야기 ⑦태극기와 게양대

‘그리고, 만들고, 내걸고’…태극기와 늘 함께한 삶
장대에 걸다가 제자들 생각해 게양대 제대로 제작
“손주들이 기억해 주길, 태극기 강조하던 할배를”

박연묵 관장이 오래전 집에 국기 게양대를 세운 사연을 들려주며, 국기함에 보관했던 태극기를 펼치고 있다.
박연묵 관장이 오래전 집에 국기 게양대를 세운 사연을 들려주며, 국기함에 보관했던 태극기를 펼치고 있다.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박연묵교육박물관엔 늘 태극기가 휘날린다. 박물관이라는 이름에서 그러려니 싶다가도, 이곳이 가정집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조금은 특이하게 다가온다. 강관으로 제대로 만든 국기 게양대까지 갖추었으니 더욱 그렇다.

‘저 태극기는 언제부터 저렇게 펄럭였을까?’ 문득 드는 궁금증을 풀다 보니, 역시나! 박연묵 관장의 남다른 애정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박연묵교육박물관엔 늘 태극기가 휘날린다.
박연묵교육박물관엔 늘 태극기가 휘날린다.

“내가 초등 3학년까지는 일제시대(=일제 강점기)라. 그때까지만 해도 내는 일장기가 우리 국기인 줄 알고 숭상했어. 그땐 히노마루라 캤지. 그러다 해방이 되니까 국기가 바뀌더라고, 태극기로! 어릴 때니까 애국심 같은 건 모르겠고. 그냥 그림이 참 좋아, 일장기보다. 그래서 그때부터 태극기를 집에 달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일장기를 우리의 국기로 여겼다는 대목이 서글프면서도 무섭다. 일본 정부 아래 이뤄진 식민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교육의 힘과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박 관장은 해방과 함께 알게 된 태극기가 너무 멋지다고 여겨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많이도 그렸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손에 드는 수기 형태의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곤 했다. 이 무렵 함께 시작한 일이 태극기 게양이다.

“태극기를 처음 게시했을 땐 마루에다 했지. 좀 지나 바깥에 게양용을 내걸었는데, 그땐 대나무 장대를 이용했다. 그러다 1982년쯤이지 아마. 고물상 일을 하며 진주를 오가는 동네 동생에게 부탁해서 진주서 굵은 쇠 파이프(=강관)를 샀지. 그때만 해도 사천에는 (강관을) 파는 데가 없을 때라. 모래와 시멘트를 비벼서, 그렇게 국기 게양대를 마련했다 아이가.”

태극기 게양대가 1982년 8월 3일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표시.
태극기 게양대가 1982년 8월 3일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표시.

박연묵교육박물관의 출입문을 지키는 국기 게양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게양대의 바닥에는 1982년 8월 3일에 세웠음을 뜻하는 ‘1982.8.3.’이라는 표시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이렇듯 박 관장이 태극기 게양대를 제대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어릴 땐 태극기가 마냥 좋아서 했고. 그러니까 애국심 같은 것도 더 생겼지. 마을 주민들을 계몽하는 뜻도 있었다 할까. 나중엔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아이가. 국경일이면 태극기를 꼭 달아라, 어째라 하고. 또 혹시라도 학생들이 우리 집에 오는 일도 있거든. 그럴 때 교육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한 기라. ‘선생님 집에 가니까 국기가 달려 있더라!’ 이렇게 느끼라고.”

더 튼튼한 게양대를 세우고, 그곳에 모양새 반듯하게 태극기를 내건 일은 결국 박연묵 관장의 교육 철학에서 비롯된 셈이다.

박 관장은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태극기를 내걸고 걷는 일을 날마다 했다. 태극기 게양에 관한 규정이 완화되어 비를 맞히고 밤을 새우게 하는 일이 가능했음에도 그렇게 하고픈 그의 마음을 따랐다. 몸이 불편해 지금은 그럴 수 없노라 말하는 그의 눈빛이 순간 반짝인다.

“보여 줄 게 있다.”

그가 전시대 한쪽에서 꺼낸 건 태극기함과 비닐 꾸러미. 그 속에는 여러 장의 태극기가 들어 있다. 심지어 아직 쓰지 않은 새것도 여럿이다.

“요게 국기함이거든. 요거는 좀 커서, 2호다. 국경일에는 태극기 다는 게 달라서, 이렇게 큰 걸 달아야 한다. 내가 뭘 하면 이리 철두철미하다. 그리고 이거는 다 새기다. 맨날 햇빛 쐬고 비바람 맞으니까 태극기가 금방 상하거든. 그래서 한 번 살 때 열 장, 스무 장 사는 기라. 가게 주인이 ‘태극기 장사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허허허.”

박연묵 관장의 큰 손녀가 어릴 적에 태극기를 게양대에 올리는 모습.
박연묵 관장의 큰 손녀가 어릴 적에 태극기를 게양대에 올리는 모습.

박연묵 관장의 애틋한 태극기 사랑. 그런 마음을 제자들에게만 심어주고 싶었던 건 아니다. 어쩌면 더 뜨겁게 손주들을 향했다. 나아가 행동으로 옮기도록 이르고 일렀다. 이런 성화에 할아버지 댁을 찾은 그의 손주들은 아침이면 태극기를 내걸고, 저녁이면 태극기를 내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손주들이 집에 오모 꼭 해야 되는 일이라. 아침에 ‘국기 달았나?’ 묻고, 저녁 되모 ‘국기 내리라’ 하거든. 미국에서 대학 공부를 한 큰 손녀가 언젠가 얘기하데. 미국에 있으니 할배 생각이 절로 나더라고. 미국에 오니까 유난히 애국심을 강조하는 문화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할배 집에만 가면 태극기를 달고, 또 그때 배웠던 매듭 방법 같은 기 생각났다는 기라. 그런 얘기 들으면 내는 기분 좋지.”

그가 손주들에게 태극기 사랑을 강조한 건 결국 ‘나라 사랑’ 마음을 키우라는 뜻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가의 소중함을 그만큼 절실히 느꼈던 결과다.

“잠시 들를 뿐 같이 사는 게 아니니까, 여러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 그래서 태극기 하나라도 똑바로 가르치고 싶은 기라. 국기라도 귀하게 여기라고. 내가 아이들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싶으냐 하모, 내가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아이구, 그때 할배가 얼마나 국기를 챙겼는지, 그때 생각하모 몸서리가 난다’ 이런 소리라.”

 

박연묵교육박물관엔 늘 태극기가 휘날린다.
박연묵교육박물관엔 늘 태극기가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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