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경운기 없는 삶, 빈자리를 채운 건 ‘이것’
출퇴근용으로 쓰기 시작한 자전거가 평생 반려자로
불편과 부족으로 만들다…“세상에 하나뿐인 수레”

40년 가까운 세월을 박연묵 관장과 함께한 자전거다. 그 시간이 내려앉은 듯 안장이 심하게 닳았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박연묵 관장과 함께한 자전거다. 그 시간이 내려앉은 듯 안장이 심하게 닳았다.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박연묵 관장은 자동차를 가진 적이 없다. 운전면허를 갖겠다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30년 넘게 초등 교육에 몸담았다면 여러 학교를 옮겨가며 출퇴근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더구나 그 세월에 이사도 한번 한 적이 없으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뒤따른다. 그의 이동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자전거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전거가 내 발이라. 지금도 용현농협에 일 보러 가면 직원들이 걱정을 한다. 함부로 자전거 타고 오지 마라고. 당연히 지금은 안 타지. 인자는 마 여기 가만히 세워 놓고 있다. 자전거는 멀쩡한데, 우짜끼고. 주인이 늙어서 더 못 타겄는데.”

박연묵교육박물관 입구를 지키고 선 낡은 자전거를 바라보는 박 관장의 눈길에는 자랑과 아쉬움이 같이 묻어났다. 그 자랑 중 으뜸은 자전거의 안장이다.

“이런 앉은개(=안장) 봤나? 이거 엄청 귀한 기라. 요즘 TV에 옛날 자전거 소개하는 거 봐도 이런 거 잘 없더라. 나도 중고로 구입한 거라 나이가 올매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중간에 한 번 잃어버리기도 했다가 다시 찾은 거라 사연이 많다. 정도 꽤 들었지. 이런 앉은개가 엄청 편하다. 이게 가죽이거등?”

그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닳고 헤진 자전거 안장이 있다. 영어로 ‘TRADE MARK’라 적힌 이름표가 안장 꽁무니에 붙었다. 안장을 떠받치는 쇠 구조물에는 검붉은 녹이 거칠게 피었다. 뼈대와 바퀴 일부를 교체할 때도 안장만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 자전거. 박 관장과 함께한 나날이 30년이 훌쩍 넘었다.

“내가 자전거를 처음 탄 건 사남초등학교 있을 때라. 1974년쯤이었지. 학교에 자전거 하나가 제공되었는데, 별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주로 사용했다. 그러다 1979년에 구호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버스 시간이 안 맞아. 할 수 없이 새 자전거를 샀지, 아주 좋은 걸로! 그때만 해도 사천비행장을 통과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1시간쯤 걸리더라. 그 뒤로 자전거를 잃어버렸어. 할 수 없이 고물상에서 중고 자전거를 또 샀다. 그게 이 자전거라. 이것도 한 번 잃어버렸다가 돌아왔는데, 다행히 인연이 있었등가베.”

그의 자전거 사랑은 이렇듯 각별하다. 고성군의 한 학교로 발령 났을 땐 집(용현면 신복마을)에서 사천읍 터미널까지 자전거로 와서는 고성읍까지 버스로, 고성읍에선 다시 고물 자전거를 하나 마련해 놓고선 이동 도구로 삼았을 정도다. 그의 근검절약은 각종 기록작업이나 수집, 보관 일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았기에 택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에게 교사라는 직업이 인생의 절반에 가까웠다면, 평생 놓지 않은 직업은 농부였다. 3천 평이 넘는 논과 밭을 농촌에 흔하디흔한 경운기 하나 없이 일궈 왔다. 불편과 부족은 번뜩이는 재치를 불러냈다.

“우리 논밭은 산을 끼고 있어서 길이 험해. 경운기가 없으니 리어카(손수레)를 쓸 수밖에 없는데, 빈 리어카도 너무 무거운 기라. 그래서 특별히 주문 제작 했다 아이가. 이거는 병원 휠체어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자전거 바퀴로 만들었다. 가벼워서 끌고 다니기가 참 쉬워. 저거는 아예 널판을 없애삣다. 그물망을 쳤더니 더 가볍는기라. 나이가 들고 힘이 딸리니까 이래 자꾸 머리를 쓴다.”

박 관장이 직접 고안해 만든 손수레를 소개하고 있다.
박 관장이 직접 고안해 만든 손수레를 소개하고 있다.

처마 밑에 세워 놓은 손수레 하나가 늠름하다. 그의 설명처럼 여느 손수레에다 자전거 바퀴를 단 것이 훨씬 날렵해 보인다고 할까. 너른 마당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기 또 다른 수레들이 인사하듯 늘어섰다.

“이거는 시멘트처럼 무거운 짐을 옮기는 데 좋아. 짐을 싣고 부리기가 좋지. 내가 직접 설계했으니까 세상에 하나뿐이라 캐도 과언이 아니라. 그런데 딱 하나가 더 있다. 우리 집에 왔던 사람이 이걸 보고는 ‘비용을 댈 테니 나도 하나 만들어 달라’ 그러는 기라. 이걸 제작한 사람을 찾아가 거듭 부탁해서 만들어줬더니, 지금도 좋다고 연락이 온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해맑다. 나름의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고안한 장비, 그 쓸모를 누군가가 알아주니 어찌 안 즐거울까.

그의 집이자 박연묵교육박물관에는 이처럼 생활 도구 하나에도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녹아 있다. 덩치가 큰 건물도 마찬가지다. 박 관장은 언제 짓고 왜 고쳤는지, 공공 건축물의 그것처럼 역사를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은 지금도 이어진다. 훗날 자신의 기억에 공감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다.

박연묵 관장은 건축물에 관한 기록도 곳곳에 남겨 놓았다.
박연묵 관장은 건축물에 관한 기록도 곳곳에 남겨 놓았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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