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박연묵교육박물관이 품은 이야기 ④일기장

국가기록원이 가치 인정…난중일기와 나란히 전시
“피난 광경, 참으로 구슬퍼”…한국전쟁 기록 고스란히
일기로 시작한 기록 습관, 49개 일지로 나눠 세분화

박연묵 관장의 기록하는 습관은 일기 쓰기에서 나왔다. 1949~1951년의 일기장.
박연묵 관장의 기록하는 습관은 일기 쓰기에서 나왔다. 1949~1951년의 일기장.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정부 기관 가운데 기록물 관리에 힘쓰는 곳이 국가기록원이다. 여기선 공공기관의 기록물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요한 민간과 해외 소재 기록물까지 수집하고 보관한다. 그 국가기록원이 2010년 6월에 서울 코엑스 전시관에서 국제기록문화 전시회를 열면서 박연묵 관장을 초대했다. 그의 기록하는 습관과 그 결과물의 가치를 대번에 알아본 것이다.

당시에 국가기록원이 박연묵교육박물관의 기록물 가운데 가장 주목했던 건 그의 일기장이다. 1949년부터 2010년까지, 61년의 개인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으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그의 일기에선 그때그때의 시대상도 엿볼 수 있었기에 높게 평가한 모양이다.

“일기는 전쟁 앞 해부터 쓰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그냥 내 자신에서 우러난 거라. 일기장이 따로 없으니까, 처음엔 담임 선생님께 부탁해서 직접 만들었다. 내가 양식을 하나 만들어서 ‘이걸 복사 좀 해주시오’ 했지. 그랬더니 진짜 복사해 주셨어. 그래서 일기를 시작할 수 있었지. 그때는 일기도 아인 거지. 수업 뭐 했는지, 과목별로 뭐 배웠는지만 짧게 썼다.”

박연묵 관장이 직접 도안한 초기 일기장은 가로로 4칸에 세로로 21칸이다. 날짜와 요일, 날씨 정보를 짧게 넣고, 이어 남은 칸에 두 줄로 일기를 썼다. 그러니 한 바닥엔 스무하룻날의 일기가 담겼다. 깨알 같은 크기로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에서 그의 꼼꼼한 기질이 엿보인다.

1950년 일기장의 첫 장.
1950년 일기장의 첫 장.

그는 일기장에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얽힌 이야기는 되도록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세상사가 아예 묻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그의 1950년 일기장에서 한국전쟁 발발을 바라보는 한 소년의 슬픔과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다.

“(6월 25일) 싸이렌이 일찍 불어서 대단히 의심이 왔다.” “(6월 26일) 삼팔선에서 싸운다고 말을 들으니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듯하다.” “(7월 8일) 비상시국 학도 총궐기대회를 오후 2시부터 개시함. ○○군이 대전까지 왔다고 말을 듣고 대단히 나는 슬펐다.” “(7월 15일) 강원도 근방에서 피난 온 광경을 보니 참으로 구슬프다. 방학한다고 말함.” “사천만 서쪽에서 공산과 싸우는 비행 소리와 아울러 기관총 소리는 나의 애를….” “(7월 30일) 밤에는 난리 피난 간다고 산에 가서 누워 잠.” “(8월 2일) 인민군이 왔다고 함.” “(8월 11일) 감나무 밑에서 짚신을 삼고 있으니까 비행기가 우리들을 보고 기관총을 쐈다.”

그의 일기는 쭉 이어진다. 전선의 최후방이나 다름없는 사천도 점점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소중한 기록이다. 국가기록원이 이 일기장을 이순신의 난중일기, 안창호·김구·윤봉길의 일기와 나란히 전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로선 큰 영광이었지.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꿈이나 꿨겠나? 하지만 내가 일기를 쓰는 건 오로지 나를 위해 쓰는 기라. 누가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나의 사생활, 모든 일상이 기록되어 있거든. 훗날 누가 내 일기를 본다면 나, 박연묵이를 보는 거지. 그러니까 내 일기는 바로 나야.”

일기는 박연묵 관장에게 기록하는 습관을 본격적으로 갖게 한 출발점이다. 일기장이 쌓이고 또 쌓여 옛 기억을 더듬기가 불편할 무렵, 새롭게 쓰기 시작한 게 각종 일지와 대장이다. 양봉 일지, 공구 대장, 촬영 대장, 가족 연혁 등이다. 그런 일지와 대장이 49개에 이른다.

박 관장은 ‘지금의 나’를 잊지 않으려 75년째 일기 쓰기에 오늘도 정성을 쏟는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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