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일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또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인간적입니다. 오래전부터 철학자와 예술가, 정치인, 문학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고민해 왔습니다. 인간 존재의 근거이면서 시대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깊은 통찰력을 빌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과 깊은 관련성이 있고 이목을 끄는 흥미로운 얘깃거리입니다. 학자들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시공을 초월하여 이에 대한 논쟁을 펼쳤습니다. 자기주장을 앞세워 시시비비를 가리려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한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답을 얻기란 모래밭에서 좁쌀 찾기였습니다. 정답 운운하는 사실 자체가 부족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혁명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돕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 시 「핀셋」에서

농민이면서 노동자이고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는 이같이 주장했습니다. 생명 탄생을 돕는 일은 의사가 없던 시절에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두메산골에서 자손을 낳아 풍성하게 기른 시골 아낙의 손길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 탄생을 돕는 일이 의사의 본분이요 혁명이라면 이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실천입니다. 또한 누구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실천입니다. 새로운 생명이란 미래 세상의 희망입니다. 새로운 생명이란 시민들이 꿈꿔 온 평등한 세상입니다. 인류가 희망과 평등이라는 밥과 밥반찬을 즐기려면, 어른들의 번민이 무탐無貪하고 어른들의 지혜로운 역할이 공감을 획득해야 합니다. 

“마르티는 이렇게 말했다/ 싸움을 피할 수 있는 데도/ 싸움을 하는 자는 범죄자이다/ 그런 자는/ 피해서는 안 될 싸움에는/ 꼭 피한다” - 시 「핀셋」에서

싸움판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는 가히 진정한 승리자라 하겠습니다. 주먹보다 이성적인 판단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목표와 가치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피를 흘리고 생명을 잃는 희생을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깊이 각인한 상처의 후유증은 영원히 치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참혹한 고통을 끊임없이 되밟고 있는 것은 죽음보다, 천형보다 더한 고문입니다. 고통의 흑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잔악한 존재인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 시 「나의 삶」에서 

체 게바라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심오한 의중을 피력했습니다. 가을 문턱에 섰습니다. 매미 한 마리가 날개를 파드닥거리며 땅 위를 몸부림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둡니다. 그의 곁에는 가녀린 바람만 오갈 뿐 아무 흔적조차 없습니다. ‘왜 사는가, 삶의 문은 어떻게 닫을 건가’에 대한 풀이는 이 순간 살아남은 자의 몫입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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