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동 이용호
향촌동 이용호

유년의 여름은 장마와 함께 찾아왔다. 유월이 저물 즈음 시작된 장마는 거센 태풍을 동반했다. 며칠 내내 지루하게 퍼붓던 빗줄기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쳤다. 장마의 눅눅함을 견디기엔 충분했다. 매년 봄에 동리마다 제방 높이는 행사가 있어서 든든했지만, 장마철 폭우에는 때때로 속수무책 피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읍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에는 시뻘건 황톳물이 위협적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제방에 올라서서 하루 종일 물 구경하는 게 일과였다. 하천변 논밭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고, 제방을 반쯤 삼킨 물줄기는 기어코 저녁나절에 피난 경보를 뱉고 말았다.

다행히 밤새 제방을 넘지 못한 황톳물은 읍내 다리 난간에 겨우 턱을 걸어둔 채 여전히 막바지 기세를 과시했다. 잠시 비가 그치고 제방 위에는 물 구경하는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산 윗마을에서 돼지와 닭, 오리들이 떠내려 오는 통에 횡재수를 건지려는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몇몇은 성과를 거뒀지만, 물살에 유명을 달리한 어르신들도 여럿 생겨나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에겐 그저 무섭고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한바탕 홍역을 앓은 하천은 거대한 해수욕장으로 변했다. 장마를 물리친 7월 중순 후부터 조무래기들의 방학도 시작되었다. 물줄기 따라 연어가 지천으로 올라왔다. 아이들은 철사줄로 물살을 후려쳐 연어를 잡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낮에는 다리 밑 그늘에 경로당이 펼쳐졌고, 밤에는 목욕하는 마을 사람들로 야간 해수욕장이 열렸다. 모래밭엔 떠돌이 천막극장이 설치되어 여름밤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들판마다 지천으로 수박과 참외가 익어갔다. 멱 감다 지친 조무래기들에게 원두막 주인의 수박 인심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벼락바위 여울목에서 다이빙하다 싫증이 나면, 과수원에 숨어 들어가 복숭아를 서리해 허기를 채웠다. 누군가는 복숭아털에 온 입술이 퉁퉁 붓기도 했다. 주인에게 걸려도 복숭아 몇 개를 쥐여주며 가지는 꺾지 말라고 당부하는 게 전부였다.

탐구생활이 한 장 두 장 채워질 즈음, 8월의 들판은 야생마처럼 익어갔다. 말라가는 하천에는 밤새 목욕하기 위해 파놓은 웅덩이들이 분화구처럼 총총했다. 새까맣게 탄 아이들 틈새로, 방학 내내 서울에 다녀온 친구의 새하얀 얼굴이 구경거리였다. 몰아 쓴 일기장에는 어설프게 적힌 날씨가 생뚱맞게 웃고 있고, 곤충채집에 희생된 귀뚜라미와 잠자리 박제가 잠들었던 과학실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지루하거나 질척거리거나 변화무쌍한 여름이 아니었다. 시곗바늘처럼 질서 있게 찾아와 한 번씩 동리를 뒤집어 놓긴 했지만, 그 변화 속에서 마을은 다시 뭉치고 활기를 찾았다. 조무래기들의 축제였던 여름이 기억의 저편에서 오래도록 추억으로 아로새겨진 이유다. 

50여 일에 가까운 사상 초유의 장마 속에서 여름마저도 실종되었다. 흐지부지 담 넘어간 춘삼월 사이로 초여름이 엄습하더니 ‘7말 8초’의 휴가철도 여지없이 몰락했다. 벌써 가을소리가 첫 차를 탔으니, 계절의 질서가 온통 혼돈 속에 빠져들고 있다. 코로나19까지 겹쳐 설상가상이다.

아이들이 입학식도 개학식도 방학도 빼앗겨 버린 여름이다. 슬기로운 여름 생활이 희귀한 체험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나만의 기우일까?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는데, 라떼는 말이야, 정말 여름다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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