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여기인. 15×20. 2019.

나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나를 서예가라 부른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하고 있는 짓이 붓을 잡는 일일 것이다.

최근 진주에 있는 책방을 오고가며 새삼 느낀 것이, 우리는 수많은 글씨에 노출되어 있었다. 공기처럼 너무도 익숙하다. 일상들이 글씨로 온통 채워져 있었다. 책방의 간판글씨도, 책 표제(標題)글씨도 그렇다. 손글씨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대부분 서예가의 글씨가 아닌 어느 유명인들의 글씨였다. 그들의 생각이 액자가 되었고, 달력이 되어졌다. 판화가 이철수의 글씨가 더 낯이 익는다. 신영복선생의 글씨가 더 유명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서예가의 글씨보다 그들의 글씨에 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서예가들이 서법(書法)과 필법(筆法)에 얽매여 있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글씨를 쓰고 있는 어느 화가나 작가의 글씨를 더 사랑했다. 생각이나 사상을 술술 풀어 써 내려간 작가는 애정을 담아 그의 이야기를 글씨로 쓰고 있었고, 누구나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의 색깔대로 담담하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글씨는 누구나가 쓰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글씨가 서예가의 전유물이라 생각 했었고, 남들의 글씨를 서법(書法)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젠 세대(世代)가 바뀌어 제대로 읽어 낼 수 없는 한자를 흉내 내는 것이나, 수련하듯 누구의 서체(書體)를 따라 써 내려 가는 그런 글씨에 대중들은 흥미가 없다. 그들은 골(骨)과 용필(用筆)과 기운생동(氣韻生動)만을 이야기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끼리 열심히 용필 다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가 곧 그 사람이다. 흉내 내는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에 나를 담아내고 싶었다. 가수가 곡을 쓰고 자신 취향의 음악을 하듯이, 서예가인 나도 나를 닮은 글씨를 쓰고, 내 글씨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호흡하길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고 싶었지 대단하게 존경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문자가 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붓으로 써 내려가다 보면 나는 간혹 시인이 되기도 하고 철학가가 되기도 한다. 붓 한 자루로 오감을 자극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마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글씨콘서트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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