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로운. 15×20. 2019.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어떤 말조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나는 여기를 벗어나지 않아도 좋다. 하루 종일 최소한의 숨소리만 내며 이렇게 꼼짝없이 앉아 있을 것이다. 몸속에 깊숙이 각인 되어 있던 긴장을 풀었다. 두 눈에 초점을 해지 시키니 사방이 온통 흐릿해져 온다. 다리근육에 힘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항상 힘이 들어가 있는 애처로운 내 어깻죽지를 지구의 중력만큼이나 축 늘어 뜨려 보았다. 그리고는 온 몸의 세포들을 무장 해제 시켜 본다. 예민하게 엉킨 내 신경 조직들을 풀어 헤쳐 본다. 혈관을 타고 도는 피의 소리를 숨죽여 들어본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탁상 등을 환하게 켜놓고, 책상 위 아무렇지도 않게 너부러져있는 종이더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저 쳐다만 보았다.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포스트잇의 색깔이 오선지 위에 음표마냥 자유롭다. 그저 쳐다만 보았다. 침묵이었다. 오늘은 내가 굳이 찾지 않으면 아무런 약속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계를 쳐다볼 필요가 없었다. 창문 밖으로 느껴지는 해의 기운으로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 이렇게 여기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난 안전한 고독을 느꼈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나에게 어떤 공간이 생긴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전한 고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노크를 해야지만 들어올 수 있는 나의 공간은 오롯이 나로만 채워져 있었다. 내가 쓰는 붓, 내가 쓰는 종이, 내가 쓰는 노트북, 내가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쪽지들, 내가 꼽아 놓은 필기구들, 내가 듣는 스피커까지도 다른 누군가의 손때라고는 없다. 난방기 돌아가는 소리까지도 조용히 듣고 있으면 이젠 내 숨과 맥박소리만큼 익숙해져 버렸다. 지나가는 차의 속도도, 간혹 폭주족의 오토바이 굉음까지도 안전한 고독속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내가 가장 안전한 고독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언어도 필요 없었다. 나는 나 저는 저대로의 세상이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화선지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만 날 것이다. 간혹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파이프 관 진동소리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한 공간에 침묵으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고독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 고독은 불안하지 않고 너무도 완전해서 가슴 시리도록 안전한 고독임을 알아 차려 버렸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매일 이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래서 고독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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