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愛(사랑하다). 30×25. 2018.

사춘기는 병명이었다. 부모인 내가 장렬히 싸워 굴복 시킬 수 있는 게 아닌, 아이의 몸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변화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단기 고질병’이라 나는 단정 지었다. 아들 방 문짝 하나 부수고 깨달은 이치다. 급히 머리 굴려 평화협정 끝에 선택한 것이 앵무새 키우기.

샨쵸라는 녀석은 그렇게 우리 가족이 되었다. 덕분에 아들과의 소통도 쉬웠으니, 온 가족 모두 그 녀석을 향한 사랑이 지극했다. 집안에 물건이 온전한 게 없을 지경으로 갉아대어도 샨쵸는 용서가 되었으며, 변을 떨어뜨려도 누구 하나 싫어하는 내색 없이 따라 다니며 뒤처리를 해주었다. 샨쵸는 아들과 모든 일상을 함께 했다. 결국 그 일상을 함께하다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의 목에 깃들여 자던 샨쵸가 그 날은, 새벽에 물을 마시고 다시 들어가다 아들의 등짝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참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들은 아직까지 샨쵸 죽음의 원인을 모른다. 슬픔에 싸여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들을 보다 못해 김해까지 수소문 해 2개월이 채 안된 버찌를 다시 분양해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어찌 아빠에게만 가는 것인가. 덕분에 아들은 사춘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앵무새와 멀어지게 되었고, 대신 아빠는 집안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 편이 생긴 기쁨에 온 정성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안방은 부부의 은밀한 공간이 아니라 셋이서 동침하는 공간이 되었고, 직장에 갈 때를 제외하곤 어디든 어깨에 올려 버찌를 데리고 다녔다. 동네 어귀에 아빠의 차가 들어서면 버찌는 소리를 빽 질러대는 교감을 보여 줬다. 아빠가 출근하려하면 현관까지 뒤뚱뒤뚱 따라 가며 울어 댄다. 까칠한 이 집 여자와 아들보다 못할 게 전혀 없는 버찌였다.

그런 버찌가 5개월 만에 갑자기 픽 하며 쓰러져 죽어 버렸다. 출근해 있는데 자꾸만 핸드폰이 울려대고 그 너머로 훌쩍훌쩍 흐느끼는 남자를 보고 징징 거리지 말라며 짜증을 부렸다. 또다시 온 집안은 초상집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원인분석을 다 마치고는 아비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그러니깐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적당히 좀 하시라고 했잖아요. 귤을 좋아한다고 허구한 날 그리 귤을 먹여 댔으니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콩알만큼 크기의 위를 가지고 있는 버찌라구요. 그리고 귤은 당이 높아서 아마 당뇨도 원인이 되었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이제까지 먹은 게 앵무새 먹이었어? 어느 날부터 냉장고에 귤을 꺼내 먹어도 먹어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채워지기에, 우리 집 남자가 내가 좋아하는 귤을 저리도 계속 사다 넣어 놓는구나 했다. 물론, 버찌의 부재 이후론 집 어느 구석에서도 귤 비슷한 것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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