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박물관 개최 심포지엄에서 다양한 연구 발표
“늑도는 무역 허브항”… “낙랑 이전에도 활발”

▲ 국립진주박물관이 8월 27일 마련한 학술심포지엄에서 전문연구자들이 종합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천 늑도 유적 발굴 30주년을 기념해 ‘국제무역항 늑도와 하루노쓰지’ 특별전을 열고 있는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최영창)이 이와 연계한 학술심포지엄을 마련했다. 심포지엄에선 늑도 유적의 형성 시기와 성격을 두고 열띤 토론이 이어져 눈길을 끌었다.

8월 27일 진주박물관 강당에서 개최된 학술심포지엄의 주제는 ‘늑도와 하루노쓰지를 통해 본 동아시아 교류의 양상’. 약 2000년 전 동아시아 교류에 관한 각 분야 전문연구자들이 모여 현재까지의 연구현황과 성과를 정리하는 자리이자, 이번 특별전을 통해 새롭게 공개된 늑도의 유물들을 바탕으로 당시 해상교역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해보는 자리였다.

이날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기조강연에서 “늑도가 해상 국제무역의 중간 거점 역할을 맡았음을 알게 됐고, 당시 ‘해상의 길’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늑도 유적의 발굴 의미를 되새겼다.

이어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이 ‘늑도 유적의 성격과 사회구조’, 동아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이지은 교수가 ‘늑도에서 보이는 동물뼈를 이용한 의례양상에 대한 시론’,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이창희 교수가 ‘늑도의 대외교섭’,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정인성 교수가 ‘늑도와 하루노쓰지 시기의 동아시아 교류 체계’를 주제로 연구발표 시간을 가졌다.

이재현 실장은 발표에서 “늑도는 남해안 항로상의 교통요지에 위치하여 변한과 진한의 철을 구입하거나 낙랑과의 무역을 위해 오가는 제 항해세력이 체제하는 허브항이자 제의장소로 기능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주거지 위쪽인 큰섬산 중턱 패총에서 복골, 미니어처 토기, 동물 또는 배 모양 토제품, 골검이나 토제 검파두식 모형품 등이 발견된 것에 미뤄 “(늑도에) 일정기간 체류하면서 해신에 대한 제사를 통해 무사항해를 기원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이지은 교수는 동물뼈를 이용해 점을 치는 복골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늑도에서 복골에 주로 이용된 뼈는 사슴의 견갑골이며, 옛 항해인들은 자연을 두려워한 나머지 중간 기착지에서 복골을 이용해 점을 자주 쳤다고 설명했다.

이창희 교수는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피면서 늑도를 “상공업적 성격이 강한 취락”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미 왜와의 관계를 통해 대외교섭력이 축적되고 있었는데,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교역망이 확대됨에 따라 기원전 1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며 늑도 유적 형성 시기를 추정했다. 또 늑도가 농업생산기반이 취약한 점 등을 들어 “독립적 체제를 갖추기보다 육지의 다른 모(某)집단으로부터 컨트롤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고, “늑도의 붕괴 원인도 모집단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인성 교수는 늑도 유적 형성 시기와 관련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의 약 200년’이란 역사학계의 일반적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다. 낙랑군(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 설치 이후 철기문화가 보급되고 국제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늑도가 성장했다는 주장에 반기를 든 셈이다. 그는 “진변한 지역에서의 철기 생산 시기가 낙랑군 설치보다 앞선다. 그 주체세력은 고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며, “늑도 유물 중 일부 철기와 토기는 기원전 3~2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일본 학자들은 하루노쓰지 유적의 성격과 대외교섭에 관한 연구결과도 발표했다.
심포지엄 참석 학자들은 이어진 종합 토론에서 늑도와 하루노쓰지 유적의 성격과 구조에 관해 의견을 이어갔다. 참석자들은 김해와 거제가 아니라 사천의 작은 섬 늑도에 교역항이 형성된 이유, 늑도 유적의 쇠퇴한 배경 등에 관해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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