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사천에 유치원이 두 개 있었다. 그 시절에 웬만한 고장은 비록 도회지라도 초등학교는 있어도 유치원이 설립되어 있는 곳은 드물었는데 사천은 유달랐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비행장이 있어 왜인들이 많았던 탓인지 민간 시설인 ‘사천유치원’, 공군 가족들을 위한 ‘기지유치원’이 있었던 것이다.

난 이 두 곳을 다 다녔다. 그렇다고 두 해를 다닌 것은 아니고 한 해에 옮겨가며 두 곳을 다닌 것이다. 처음에 사천유치원에 입학했는데 그 유치원에는 매일 ‘서울빵집’의 단팥빵 하나와 크림빵 하나씩을 주었다.

그 달콤한 빵 맛에 다녔는데 어느 날 보니 기지 유치원 아이들은 공군 버스를 타고 다니지 않는가? 비행장 안에 유치원이 있으니 읍내 아이들에게는 통학 차량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차를 타고 다니는 재미가 있어 보여서 기지 유치원으로 전학을 했는데 군대 빵이 영 맛이 없어서 중도하차해 버렸다.

결국 두 군데 유치원을 섭렵했지만 막상 졸업은 하지 못했는데 아버지께서 지방 유지였던 관계로 두 유치원에서 다 졸업장을 보내 왔다.

이런 나를 소시 적에 집안에서 ‘불량쟁이’라 불렀다. 성인이라면 ‘왈짜’, ‘불한당’, ‘깡패’ 쯤에 해당하겠다. 나는 욕심쟁이에다 욕쟁이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는 말을 한 번 듣고 나서는 장가가지 않은 일꾼들에게는 무조건 하대를 했고 더하여 욕심과 용심이 많아서 우리 집 물건을 다른 사람이 쓰면 악다구니를 부렸다.

집안에는 일꾼들이 여러 명 기식하고 있었는데 양치질할 때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 집의 치약을 사용했다하면 마구 욕을 퍼부어 대는 식이었다. 그런 악질 놀부가 따로 없었다. 형이 동네 꼬마들에게 맞고 울고 오기라도하면 내 키 만큼이나 큰 몽둥이를 질질 끌고 나가서 형 친구들을 울리곤 했다.

어린 시절 네 살 터울이면 덩치 차이가 크지만 몽둥이 앞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게 개차반이었던 성깔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싹 바뀌었다. 집안에만 놀았던 어린 시절, 할머니의 편애와 부모님의 보호 속에 ‘우물 안 개구리’에 독불장군 노릇을 하다가 학교란 바깥세상으로 나가 무서운 선생님도 만나고 하면서 ‘세상이 넓다(?)’는 깨달음으로 철이 났고 그렇게 유년의 자유방임 시절은 끝이 났다.

요즈음에는 아직도 보모의 과보호 속에서 철이 안든 어른들이 많이 있다. 어디 ‘땅콩항공’의 부사장이란 철부지만 그러랴, 재벌 3세들의 패악질은 이미 도가 넘친다. 다 더러운 돈을 숭상하는 천민자본주의가 배설한 적폐들이다.

이제 나라에서도 이런 재벌들을 과보호하겠단다. 감옥에 있는 재벌 2세들을 풀어 주기위해 군불을 때고 있는 것을 보니 새해 초에는 석방될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 어릴 적 내 망나니 유년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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