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생애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인이 시집을 낸다는 것이 이상할 리 없는 일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집을 사 읽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대단한 결심이 따라야 한다. 이번 시집, ‘아무래도 나는 육식성이다’를 해설한 박설호 교수(한신대)는 말한다,

“지금까지 이정주 시인은 오랜 시간, 시 작품의 창조에 매진해 왔습니다. 그는 생업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박 교수는 ‘거의’라고 표현했다. 난 시인의 ‘거의’ 밖에 있는 사생활 속의 약간을 알고 있다. 시인은 약사이지만 가난하다. 육십을 슬쩍 넘겼는데 아직도 봉급쟁이로 약국에서 일한다. 약국 주인은 한 참 후배일 것이다. 약국에서 살금살금 번 돈으로 시집을 내었음에 틀림없다. 시인은 매년 사천에 온다. 친구가 있으니 찾아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내 하숙집에 매일 놀러 와서 담배를 축내곤 했다. 지금은 가난한 신문쟁이 술을 축낸다.

하숙집 골방에서 담배를 뽀꼼뽀꼼 피워 올려 도넛을 만들어 내곤 했는데, 앞이 빠진 개호주(그 나이에 왜 앞 이가 빠져 있었는지, 원 참!)가 만든 구름 도넛은 약간씩 찌그러져 있었다. 그 또래의 청춘들이 그러하듯 제각각 희망차고 찬란한 자신의 앞길을 전망하곤 했는데 그는 다른 친구들과 남달랐다. 너무 소박하고 얄밉도록 현실적이어서 그랬던 것이다.

“난 약대로 진학할거야, 그리고 같은 과의 예쁜 여학생을 꼬여서, 아니 예쁘지 않아도 괜찮지 뭐, 나를 좋아하면. 연애하고 마침내 결혼하는 거야, 그리고 시골 적당한 곳에 약국을 채려 놓고 내 아내는 약국을 지키고 나는 시를 찾아다니는 것이야, 마음껏 시를 쓰는 것이야!”

그 나이 적에 지닌 꿈을 이룬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랴? 그런데 이 시인은 그 꿈을 ‘거의’이루었다. 안타깝게도 ‘완벽히’가 아니고 ‘거의’ 이루었다. 그는 젊었을 때 연애를 했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 ‘약사’와 결혼하지 못하고 ‘교사’와 했다. 낱말이 통 틀린 것도 아니고 낱말 속에 단 한자 ‘약’자가 ‘교’자로 바뀐 것인데 인생이 꼬였다. 이혼을 당했으니. 그래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늘그막에 홀아비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일이 아닐 터지만 언제나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 마냥 웃고 다닌다. 차 트렁크에 전기 기타와 음향장비를 잔뜩 싣고 다니니 피리하나 달랑 들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와 비교해서는 안 되겠다.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전을 차리고 그가 개사한 유행가를 부른다. 시인의 손끝에서 재창조된 가사는 음란하기 짝이 없으나 흉하지 않다. 노랠 잘 부르는 편은 절대 아니나 열심히 부른다. ‘니 노래가 니 시보다 더 좋다!’ 라고 하면 환히 즐겁게 웃는다, 무슨 시인이 시인의 자존심도 없이.

이정주 시집을 손에 들고 보니 문득 그 시절 ‘앞이 빠진’ 개호주, 그 청춘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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