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수 10명 신입 소위들은 부대 전입해 오든 첫날 밤 영문도 모른 체 헬기 착륙장에 끌려 나가 한 기수 선배인 중위들에게서 ‘줄 빳다’를 얻어맞는 신고식을 치룬바 있었다.

중위 진급을 코앞에 두었는데 또 무슨 단체 기압이란 말인가? 자존심도 상하고 분했다.

“단체 기압 해보려면 해 봐라, 그럼 난 불명예제대 하겠다!”

당시 불같은 성격에 온 몸이 근육으로 단련된 소위가 공공연히 저항 선언을 하고 다니니 선배 장교들도 난감했을 것이다. 냉랭한 분위기가 감도는 어느 날 우리 기수 선임자인 신 소위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 오늘 저녁 7시에 우리 기수 전원 휴게실에 집합이야.”

올 것이 온 것이다. 각오를 다지며 군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묵묵히 정렬 속에 서 있었다.

선배 기수 중위가 한 명 들어왔다. 같은 계급이라도 군번이 가장 빠른 박 중위가 오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쇠 파이프를 들고 등장한 사람은 내 고등학교 선배인 이 중위였다. 평소 사석에서는 ‘형, 아우’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신 소위의 집합 신고를 받자마자,

“이 소위 앞으로! 엎드려!”

엉겁결에 ‘빳다’를 몇 대 얻어맞아 버렸다. 그 뒤론 일사천리로 다들 맞았고 기습에 성공한 이 중위는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군목인 오 중위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모두를 장교 식당에 데려 갔고 식당 식탁위에는 소주가 잔뜩 널려 있었다.

나는 만취한 상태로 분노와 수치감에 이를 갈며 BOQ(장교숙소)로 돌아가서 선임 장교들을 찾으니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미군 클럽으로 대피해 버린 것이었다. 난 쇠파이프로 선임자들 방 문짝들을 다 박살내 버렸고, 다음날 시설대에서 나와서 하루 종일 문짝을 수리했고 난 근무도 나가지 않고 온 종일 침대에 쓰러져 자 버렸다. 그리곤 다시는 그 일을 서로 간에 언급 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우리도 중위로 진급을 했고 신입 소위들을 받았다. 후배 기수들은 천방지축이었고 군기는 쏙 빠져 있었다. 동기생들 사이에 단체기압을 주야겠다는 말들이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당한 기압에 대한 보상심리도 유혹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 번이나 선배기수들에게 빳다를 맞았다. 분노하고 수치스럽지 않았냐? 언제까지 이런 병폐가 이어져야 하겠냐? 이런 폐습은 우리 기수부터 끊자!”

그 후부터 일본 군대가 심어 놓은 ‘기수 빳다’란 악폐를 그 부대에서 끊을 수 있었다.

요즘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정도가 넘고 있다. 윤 일병에 대한 살해 사건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40년 전에도 총장이 ‘구타 근절!’지시 사항이 있었지만 우이독경이었다. 지금 끝내지 못하면 또 계속될 것이다.

군 사법개혁을 통해 철저한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이 따라야 한다. 윤 일병 사건을 지켜보면서 문득 소위 시절 얻어맞았던 아픈 추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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