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의 꿈의 즉흥(Traumerische Improvisation)1913

▲ 칸딘스키의 꿈의 즉흥(Traumerische Improvisation)1913
추상(抽象)미술(Abstract Art)이란 비구상(非具象), 비대상(非對象) 미술이라고도 불린다. 좀 더 부연하자면 추상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처럼, 화가 앞에 존재하는 특정 대상물에 한정된 느낌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미술이다.

물리적인 공간에 존재하며 역시 물리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존재들, 즉 자연물을 거의 그림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미술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사람, 꽃, 동물 등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림을 보아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추상미술은 색채, 질감, 선, 새롭게 창조된 형태 등의 추상적인 요소로 작품을 표현하게 되고 또 그것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미술이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이러한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가 1911년에 독일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결성한 ‘청기사파’가 바로 이 추상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는 놀랍게도 29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그림 꿈의 즉흥은 1913년 작품으로서 칸딘스키가 청기사파를 결성한 뒤(1911) 추상화로서는 초기의 작품이다. 꿈이 가지는 몽환적인 느낌과 강렬한 즉흥적 색채감이 화면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1909년부터 1914년까지 35점의 <즉흥(Improvisation)>시리즈를 그렸는데 우연히 거꾸로 놓인 캔버스를 보고 어떠한 대상을 그렸는가에 상관없이 색채와 형태 등 기본적인 회화 요소만으로도 미(美)적인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칸딘스키는 추상화로의 변화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칸딘스키는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 민족계몽운동에 투신한다.

1922년 독일 바우하우스의 요청으로 다시 독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미술이론과 회화를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1933년 독일의 나치정부는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였고 칸딘스키는 이로 인해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프랑스에서 그는 1944년 죽을 때까지 머물게 된다.

칸딘스키를 포함한 청기사파가 가장 즐겨 사용했던 색은 파랑과 노랑 그리고 빨강, 즉 3원색이다. 프란츠 마르크, 파울 클레(나중에 청기사파에 합류한다.)의 그림에서도 3원색으로 표현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본보 5월 28자 - 파울 클레, 6월 5일자 - 프란츠 마르크) 이것은 그들이 표현하려 했던 미적 가치가 3원색의 강렬함 속에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흥이란 주로 음악에 쓰이는 용어로서 연주자의 자의로 악보와 악곡을 벗어나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미술에서도 기존의 구상 미술에서 지켜야 할 사물의 형태와 구도, 그리고 빛에 의한 명암 등, 지켜야 할 모든 틀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작가의 상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미적인 충격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놓은 그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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