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부르는 가랑비가 항구 도시 한 귀퉁이 포장마차에도 추적추적 내렸다. 1980년 가을 충무시(현재의 통영시) 한 여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군대생활을 좀 길게 한 탓에 동기들보다 2년 정도 늦은 발령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라도 내리면 동네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르곤 했다. 낯선 도시였던 탓에 술동무가 없어서 그곳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곤 했다. 주택가에 있었던 탓인지 술손님도 그다지 없어 한가해서 좋았다.

그날도 그랬다. 주모는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않았다. 나도 포장마차 지붕에 돋는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아줌마가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내일 아이 학교에 가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아이가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아뇨, 학기가 바뀌면 학부모 상담 같은 것 하잖아요? 내일 오라는데.”

“낮에 잠시 다녀오시면 되지, 무슨 걱정이에요?”

“아이고, 맨손으로 어떻게 가요? 봄에는 3천 원을 넣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5천 원은 돼야 할 것 같은데, 가을 소풍도 또 있고. 휴우.”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있으니 주모는 다시 깊은 상념에 잠긴다. 3천 원과 5천 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리라. 주객 역시 ‘촌지’에 대해 곱씹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군생활의 흔적이 여직 남아 있었기에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교사란 것을 알까봐 혼자 조마조마 했다. 바로 며칠 전 학부모로부터 학교에서 돈 봉투를 받았던 것이다.

새로 담임이 바뀌었다고 한 학부모가 인사차 찾아와서 ‘촌지’라고 쓰여 있는 봉투를 한 장 놓고 갔다. 그 속에는 3만 원이 들어 있었다.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손을 떨며 담았을 돈의 무려 열배였다!

당시 내 급여가 12만 원 남짓이었으니 상당한 액수였다. 그것을 놓고 곰곰이 고민하다가 종례시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어머니 한 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써달라며 돈을 맡겨 놓으셨어요. 그래서 급장 이름으로 된 통장에 입금을 시켜 놓겠으니 다음에 의논해서 잘 사용하도록 해요.”

그 뒤에도 두 개의 ‘촌지’를 더 받았다. 역시 입금 처리가 되었고, 물론 해당 학생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슬쩍슬쩍 주위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노련하고 능수능란 교사의 경우 ‘촌지’가 수십 개씩도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촌지 3개,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로 ‘꼬리표’가 붙어 교직생활 내내 더 이상 촌지 관련 잡무(?)는 하지 않게 돼 좋았다. ‘촌지’란 받은 사람이 챙겨 넣어야 하는데 학급에 공금으로 내놔 버리면 주는 사람으로서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대가성이 없고 스승에 대한 예의로 포장했다지만 결국은 ‘돈봉투’이고 뇌물일 수밖에 없다. 금액도 층층이라 3천 원에서 3만 원에 이르렀다. 물론 아예 봉투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빈한하면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많을 터인데 학교에서마저 차별을 받아서 될 일이 아니라 여겼고 그것은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하나의 신념으로 굳어졌다.

그 후 ‘경남교사협의회’가 창설되면서 주창한 슬로건 중 하나가 ‘촌지 거부 운동’이었고 곧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이 운동의 선언문을 성안한 곳이 서포중학교였으니 ‘촌지 거부 운동’의 발원지는 우리 고장이었던 셈이다. 전국교사협의회는 전교조로 발전하였고 전교조 교사의 상징은 ‘촌지 안 받는 교사’로 자리 잡았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3개 시도에서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되었다. 이번 유권자들의 선정 기준에서 가장 앞에 놓여 있는 덕목이 ‘청렴성’이었다.

이 청렴성의 근원은 ‘촌지 거부운동’에 바로 맥이 닿아 있다. 교육감 선거 결과를 보면서 문득 그 가을비 내리던 밤의 포장마차가 생각났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