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愛 빠질 만한 이야기-17

▲ 노산공원에서 바라본 삼천포항과 시장.

어릴 때 배워서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취미 하나가 바둑입니다. 당시 5급 수준이었던 아버지께 29점을 깔고 시작해서 전멸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 하나둘 치수 줄이는 재미로 열심히 뒀는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정석이나 여러 가지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널렸지만 그 때는 기원이나 가야만 제대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바둑 책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거의 대부분 사카다 전집이나 오청원 치수고치기 10번기 등 일본기사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기사의 기보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구하기 쉽지 않았으니, 이럴 때 애기가의 갈급을 채워준 것은 신문의 관전기 또는 잡지인 월간 바둑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재삼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바둑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문단의 인사들 대부분이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서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바둑기사와 문인들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게다가 박재삼 시인은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죠. 덕분에 바둑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박재삼 선생의 에피소드가 수시로 튀어나오곤 합니다. 예를 들어 흔히 법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두는 서투른 바둑을 낮잡아서 ‘보리바둑’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파생한 말로 언제나 선수할 수 있는 곳을 쓸데없이 남용하는 걸 ‘보리선수’라고 합니다. 이 말을 만든 사람이 바로 박재삼입니다.

그는 또 서울신문 패왕전의 관전기를 20년 동안이나 썼는데요, 필명이 요석자(樂石子)입니다. 문제는 이 요(樂)자가 낙(樂)도 되고 락(樂)도 되다보니, 바둑팬들이 박 시인에게 낙석자라고 부르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죠. 상황이 이러하니 박재삼 시인을 바둑기사나 그 주변인물 정도로 생각을 했네요. 사실 박재삼이라는 이름이 흔하지 않으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던 겁니다.

▲ 물론 노산공원 안에도 겨레의 정신인 충무공이 계신다.

동일인물이란 걸 알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바둑 때문이었습니다. 1974년 경 한국 바둑계가 양분되는 기계파동(棋界波動)이 벌어지는데요, 당시 한국기원의 총재가 날던 새도 떨어뜨렸다던 이후락이었고, 그의 비서가 한국기원의 돈을 무단 전용하는 일이 발단이었습니다.

바둑기사들이 분개해서 대한기원을 설립해 나가는데, 잘 나가던 방송극작가 조남사(趙南史)씨가 ‘한국기원으로 복귀하라’는 제목으로 비난하자 박재삼 선생이 ‘한국바둑의 법통’이란 제목으로 조목조목 통렬하게 반박하는 글을 싣습니다. 이 글은 손세일 著 『韓國論爭史(한국논쟁사)』(청람문화사, 1976)에 ‘한국기원이냐 대한기원이냐’란 제목으로 바둑관련 글로는 유일하게 수록돼 있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입석자(立石子)라는 필명으로 관전기를 썼던 소설가 강홍규의 『문학동네 사람들』에서는 <법정에 선 소설 「분지」>라는 에피소드에 대한일보의 기자로 등장을 합니다. 강홍규는 『분지』의 작가 남정현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떼지만 모두 박재삼 선생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쓴 에피소드입니다. 이렇게 시인에 대한 기억은 모두 바둑에 연관돼 있다 보니 다소 헷갈렸다고 슬그머니 변명을…….

박재삼 시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게 바로 1959년 2월 사상계에 발표한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이겠죠.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상이 따라가면/ 어느 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이외수 작가는 “제 나이 투명한 스무 살 때부터 가슴속에 놀빛 울음의 강 하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입니다”라면서 “아직도 제 가슴속에 놀빛으로 흐르고 있고 제 영혼도 온통 놀빛으로 물들겠지요”라고 극찬을 합니다.

▲ 문학관 앞에 있는 박재삼 시인의 동상

문득 이외수 작가의 시 중에 「봄의 바람에」라는 작품이 생각납니다. “江으로 가는 물 江으로 가는 모래/ 정액 냄새 화사한 밤꽃 그늘에서/ 문득 이름을 잊어버린 애인 하나야/ 나는 허물어져 江으로 간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인데, 봄과 가을이 대비되고 노을과 겨울이 대비되는 모양새가 마치 박재삼 선생에게 헌시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박재삼 시인은 생전에 노산공원에 올라 사색과 공부를 했다고 하죠. 그 자리에 동상이 있습니다. 그의 소박한 서정성이 맴도는 느낌이네요. 박재삼문학관에서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지난 연말 사천시의회가 사천의 대표 축제 중 하나인 사천세계타악축제의 예산을 삭감하면서 올해 개최는 사실상 무산이 됐습니다. 사천문화재단의 불법기부금 논란이 발단인데, 안타까운 것은 타악축제와 함께 박재삼 문학상 4천만 원 중 절반인 2천만 원이, 박재삼문학제 및 전국시인대회 3천만 원 중 1천만 원이 동강났다는 겁니다. 박재삼문학제 등도 이제 물 건너가는 건가요.

무엇보다 지역의 대표 문화 콘텐츠였던 박재삼문학제는 물론, 시인 박재삼의 명성에까지 흠집이 나버렸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인터넷에서 ‘박재삼’이라는 이름 석 자를 치면 이번 논란이 대문짝만하게 뉴스화 되어 뜨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싶어 괜히 안절부절 좌불안석입니다.

참, 삼천포고교 재학시절 ‘박재삼의 성적’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네요. 동문이나 아시는 분이 있다면 공유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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