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바다를 메워 간척사업을 한 결과물
곤양면 대진리에서 서포면 외구리에 걸친 22만 평
일본인 매립 사업자 ‘문천웅사’ 이름에서 나온 듯

사천시 곤양면 대진리와 서포면 외구리 사이에 조성된 '문천들', 일명 '문체이들'의 모습. 일제 강점기에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들판이다.
사천시 곤양면 대진리와 서포면 외구리 사이에 조성된 '문천들', 일명 '문체이들'의 모습. 일제 강점기에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들판이다.

[뉴스사천=강호광 시민기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일본 내에서는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유입되면서 쌀 수요는 늘고 생산량은 줄었다. 특히 1918년 시베리아 출병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면서 일본 각지에서는 쌀 소동이 발생했다.

일본은 본국의 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쌀 생산량을 늘리는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웠다. 일본의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해안선이 복잡한 한반도 서·남해안의 연안 해안을 메워 농지로 바꾸는 사업을 꾸준히 펼쳤다.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많은 부분 바다를 접하고 있는 사천 역시 사천만의 동, 서, 북 곳곳에서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매립사업이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손꼽히는 곳이 곤양면 대진리(大津里)와 서포면 외구리(外鳩里) 일대의 매립사업이다. 이 매립지 주변에 거주하는 지역민들은 아직도 이곳을 ‘문천들’ 또는 ‘문체이들’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이 ‘문체이들’로 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문체이들'의 오른쪽 위로 섬처럼 볼록 솟은 곳에 작도정사(鵲島精舍)가 있다. 작도정사는 조선 중기에 곤양 군수를 역임했던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 1470~1550) 선생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을 초청해 시를 읇고 노닐었던 곳임을 기념해 1925년 무렵 지역 유림들이 지은 건물이다. 그때는 이곳을 까치섬이라 불렀다.
'문체이들'의 오른쪽 위로 섬처럼 볼록 솟은 곳에 작도정사(鵲島精舍)가 있다. 작도정사는 조선 중기에 곤양 군수를 역임했던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 1470~1550) 선생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을 초청해 시를 읇고 노닐었던 곳임을 기념해 1925년 무렵 지역 유림들이 지은 건물이다. 그때는 이곳을 까치섬이라 불렀다.

이곳에 가장 먼저 매립계획을 세운 사람은 요코스카(横須賀) 출신으로 부산 대청정(大廳町)에 거주하던 마츠시타 만지로(松下萬次郞)였다. 마츠시타는 쿠마모토(熊本) 출신으로 같은 대청정에 거주하던 다카기 스에쿠마(高木末熊)와 함께 1914년 1월 대진리와 외구리 일대 약 4만 평의 매립계획을 수립하여 총독부로부터 인가받았다.

당시 이 지역은 사천군과 병합되기 전 곤양군(昆陽郡) 지역으로 대진리는 곤양군 동부면(東部面) 대진동(大津洞)으로, 외구리는 곤양군 서부면(西部面) 방천동(防川洞)에 속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마츠시타의 매립 계획은 순조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츠시타는 준공 허가를 받지 못한 채 8년이 지난 1922년 4월에 매립 규모를 3천여 평 늘려, 4만 3천여 평으로 재차 인가를 받았다. 이 무렵 마츠시타는 주소를 대진리 1021번지(대진리 제민마을 추정)로 옮기며 매립공사에 열정을 보였다. 총독부는 허가를 주며 마츠시타에게 1929년 12월 말까지 매립공사를 완료할 것을 지시하였다.

해마다 벼 수확이 끝난 문체이들에는 겨울 진객이자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가 찾아 휴식을 취하곤 한다.
해마다 벼 수확이 끝난 문체이들에는 겨울 진객이자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가 찾아 휴식을 취하곤 한다.

그러나 마츠시타는 매립공사가 순조롭지 못했던 탓인지 1924년 4월에 고베(神戸) 출신의 카도카와 유우지(門川雄司·문천웅사)를 이 매립사업의 공동 사업자로 가입시킨다. 이곳 들판이 ‘문천들’ ‘문체이들’로 불리게 된 원인이 일본인 ‘문천웅사’의 성 문천(門川)에서 연유한 것임을 여기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이후 매립사업에서 마츠시타는 물러나고 문천웅사 즉, 카도카와가 주도해 나간다. 카도카와는 1924년 9월 매립 계획을 확장하여 대진리 127,145평, 외구리 131,564평으로 다시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낸다. 대진리 127,145평의 공사를 1927년 말까지 우선 완료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하늘에서 본 문체이들과 광포만 모습.
하늘에서 본 문체이들과 광포만 모습.

그러나 카도카와의 계획도 순조롭지 못했던 듯하다. 이 사업은 총독부의 준공 허가를 받지 못한 채 1933년 2월 부산의 3대 재력가로 불리던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郎)에게 양도된다. 하지만 큰 재력가였던 하자마 역시 몇 차례에 걸쳐 총독부와의 허가 기간을 지키지 못하고 공사를 지연하였다.

지연을 반복하던 하자마는 1935년 이후 어느 시점에 야마구치(山口) 출신의 야마다 요시노리(山田誼衡)에게 사업권을 양도하였다. 결국 문천(門川)이 사라진 ‘문체이들’은 1939년 11월 17일 야마다에 의해 총독부로부터 매립 완료 허가를 받았다. 허가된 면적은 곤양면 대진리와 서포면 외구리·조도리(措道里)에 걸친 219,721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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