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나의 사진이야기]

[뉴스사천=조평자 사진작가] 부음을 받았다. 영정사진을 부탁하는 울먹이는 목소리. 죽음을 알리는 전갈을 받고 함께 슬퍼하는 일은 사람의 미덕이다. 하지만 그의 부고 소식은 너무 안타까웠다.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했다. 2014년 설 무렵이었나보다. 식구가 무려 열아홉 명이다. 2남 3녀, 온 가족이 다 모여 어머니를 모시고 스튜디오에서 찍은 가족사진 파일이 컴퓨터 모니터에 떴다. 

이렇게 화목한 가족사진에서 그의 얼굴만 떼 내어 영정사진을 급하게 만들었다. 문금연 여사님의 막내아들 이정수, 내 손은 떨렸다. 사진을 완성하는 내내 잘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정수가 그린 고향집과 거북등
이정수가 그린 고향집과 거북등

그는 미혼이다. 내가 나고 자란 남양 송천마을 한동네 후배다. 우리 마을은 바닷가에 있었다. 산과 들판, 갈대숲과 갯벌로 이루어져 사계절 풍경이 낭만적인 동네였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성웅 이순신 비석이 있는 모충공원이었다. 우리는 거북등이라고 불렀다. 정말로 거북이가 바다로 기어가는 듯 납작 엎드린 형상이었다. 그곳은 우리들의 자연 놀이터였다. 정수네 과수원이 있어서 누나들과 정수도 자주 갔다. 거북등으로 가는 길모퉁이에 음산한 상여집이 있었다. 상여집을 지날 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서워서 마구 뛰었다.

그리고 큰 비릉을 기어오르면 거북등 정상이었다. 도착하면 서로 멀지 않게 뿔뿔이 흩어져 각자 필요한 것들을 채집했다. 질경이를 캐고 아카시아 이파리를 뜯어 토끼풀을 모았다. 솔방울을 주워 담을 때 제일 재미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면 모두들 배가 고팠다. 주로 딱추를 캤다. 과수원에 배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도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모충공원엔 먹을거리가 많았다. 딱추에 붙은 흙을 툭툭 털어 손톱으로 껍데기를 까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배를 채우고도 호주머니 이쪽저쪽 가득 넣어 올 만큼 특히 딱추가 많았다. 
 

이정수가 그린 이정수
이정수가 그린 이정수

정수는 만화작가로 성장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감성으로 그려내는 그림은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비타민처럼 녹아들었다. 정수만의 캐릭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만화를 그리는 일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를 시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네 명이 팀을 꾸려 2주기 추모제 그림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길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만화작가 이정수는 그저 사람이 좋아서, 사람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섰을 뿐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 바닥에서 사흘 동안 그린 대형 걸개그림을 걸고 촛불 모아 2주기 추모제를 지냈다. 이후 정수는 서울살이를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무심코 던진 빨갱이라는 악성댓글에 여린 속이 얼마나 상했던지 닉네임을 파랑이로 바꾸고 살았다.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파랑이로 지내면서 고향 집에서 그리는 만화작품 속에는 천진난만한 어린 날들이 고스란히 뛰어놀았다. 생생한 묘사와 위트로 삼천포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바다 앞에서> 책도 발간했다. 오해와 혐오가 편을 가르는 세상에서 다친 마음을 많이 회복해 갈 즈음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누나들을 잘 따르며 상여집 지날 때 무서워서 뜀박질을 하고, 딱추를 캐서 호주머니 불룩 넣어오던 아이, 그 아이를 빨갱이! 라니. 얼마나 손 쓸 수 없는 말인지 몸으로 갚고 있었던 것이다. 투병하다가 2023년 11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영정사진만 정수의 빈방에 덩그러니 남았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아직 모른다. 유독 정수와 친했던 조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와 이모들이 너무 울어서 나는 눈물이 안 나왔어요.” 

 한데 어울려 꿈을 키우고 정을 나누던 애틋한 내 유년의 기억 속 아직도 여리고 착하기만 한 그 좋은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너무 일찍 떠나갔다. 깨어 있는 세상이여! 원칙과 상식의 나라여! 살아있는 파랑이, 이정수가 곳곳에 너무 많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