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시작한 구암학술대회가 구암학 학술대회로
구암과 연관된 유학 전반으로 연구영역 확장 계획
사천 빛낸 구암 이정 선생, 오늘날의 의미 돌아보다

이은식 문학박사
이은식 문학박사

[뉴스사천=이은식 문학박사(구계서원장)] 구계서원이 제1회 구암학 학술대회를 11월 3일 10시 사천농협 2층 회의실에서 연다. 2001년부터 시작한 구암 학술대회에서 구암학 학술대회로 명칭을 변경해 실시하는 것이다. 

구암 학술대회는 구암 이정의 학문과 사상이 중심이었다면, 구암학 학술대회는 구암 당대 시대 구암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은 인물들에 대한 연구, 구암과 연관된 유학관련 전반에 관한 연구로 확장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학계에서 구암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을 인정했다.

구암학 연구에는 구암이 편찬한 성리학 서적 24권, 서원의 창건, 조선 유학사에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등을  연구 조사할 것이다. 구암이 성리학 서적을 중국에서 구입하면서 그대로 출간하지 않고 조선의 유학 실정에 맞추어 교정하기도 하였으니, 앞으로 국제학술대회로 확장할 수도 있다. 그 중심에 구암 이정(1512-1571)이 있다.

구암 이정의 학문과 치적이 당대 유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당시 사천에 곤양군수로 재직하는 관포 어득강(1470-1550)은, 32세였던 퇴계 이황(1501-1570)을 곤양으로 초빙한 일을 필두로, 후임 곤양군수 신재 주세붕(1495-1554), 제주 목사에서 사천으로 온 규암 송인수(1487- 1547)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 중기 유학의 지성사의 중심을 사천이 되게 했다.

이 일을 기획한 사람은 관포 어득강 선생이었다. 그러므로, 구암학 학술대회는 관포 어득강에 대한 논문 발표로 시작한다. 관포 선생이 조선중기 유학사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신재 선생, 규암 선생, 퇴계 선생의 연구도 진행될 것이다. 지금까지 실시한 구암 학술대회는 구암 중심으로 논문이 생성되었다. 18년간 학술대회를 개회하여,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이 구암 연구에 참여했다. 

왜 사천사람은 구암을 잘 모르는가?

구계서원에서는 2001년 구암 학술대회를 시작했다. 그 이후 사천문화원에서 주관하여 2018년까지 구암 학술대회를 매년 개최했다. 2023년 구계서원에서 그동안 학술발표에서 얻은 학문적 성과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구암총서발간사업’으로 5년간 사천시에서 지원하여 구계서원과 여러 대학 교수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정의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번역했다.

구암이 출간한 서적 중 우리나라에 없고 일본에 있으면, 일본에 건너가서 그 서적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가져와 출간하였다. 현재 구암총서발간을 목적으로 학계에서 번역하고 기록한 원고는 A4용지로 약 6,000페이지다. 번역한 내용 일부를 학계에 발표해, 구암학이라는 학문의 바탕을 조성했다. 그러나 아직도 구암총서는 예산이 없어 발간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구암 이정에 관해 사천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원인은, 구암 이정의 자료가 거의 사천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암은 조선조 대단한 선비이고,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으나, 임진왜란 시, 왜군에 의해 구암 이정의 묘가 파헤쳐지고, 서적은 탈취당했는데다가 6.25로 인해 구계서원에서 보관해오던 자료마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떠돌아 다니던 『구암집』은 찾아내었으나, 구암이 출간한 서적들은 대학 서장고에 희귀본으로 대부분 보관되어 외부에 공개를 꺼리는 책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수탈해간 서적 중, 구암이 발간한 책이 나고야 봉좌문고에 있다는 서지학계의 조사에 의해 알려져, 구계서원에서 나고야에 찾아가 도서를 마이크로 필름 자료로 가져와서 출간했다. 당시 송도근 사천시장은 개인적으로 매우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다시 ‘구암 이정’으로

구암 이정
구암 이정 선생

사천 출신 천재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조정에서 형조, 예조 등에서 근무했고, 지방에서는 군수로 재직하면서 유학서적 편찬에 전념했다.

또한 경주에 서악서원, 순천에 옥천서원, 사천에 구계서원을 창건하였다. 경주부윤(현 경주시장)으로 근무할 때, 신라시대의 왕릉 등 유적을 3년간 복원하였는데, 후일 박정희 대통령이 조선시대에는 구암이 정비한 경주를 재정비한다고 했다. 

마지막 벼슬이 부제학이었던 구암은 만년에 늘 그리워하는 고향 사천에 살면서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구암마을을 그의 호로 삼았다. 아쉽게 제자를 길러야 하는 연령에 세상을 떠나니 학풍이 크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사천을 빛낸 최초의 인물로 조선시대에 알려져 있다. 당시 사천은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조선조 문과급제자 명단을 보면, 과거합격자는 약 13,000명에 이른다. 조정에서 발간한 과거합격자 명단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일일이 기록이 되어 있다. 이정(李楨)은 장원급제자였다. 당시의 나이는 24세. 천재였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이름 앞에 방점이 찍혀 있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이다. 1536년 (中宗 丙申年)에 사천출신으로 처음 과거에 급제자가 나왔다.

구암의 선비정신과 구계서원 

구계서원 전경.
구계서원 전경.

구계서원에는 퇴계 이황선생, 구암 이정선생, 성옹 김덕함 선생을 봉향한다. 구암선생이 서원의 터를 잡고, 구암정사라고 하면서,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 건물위 조금 떨어진 곳에 정관대(靜觀臺)라는 건물을 지었다. ‘고요히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퇴계는 이름을 대관대(大觀臺)로 고치자고 해 이름을 바꾸었다. ‘크게 바라 보는 곳’이라는 의미다. 

서원은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고, 공부하는 곳이다. 그러면서, 사당이 있어 서원나름대로 배향하는 인물을 정하고 봄이나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구계서원은 음력 2월 마지막 정일(丁日)에 춘향제를 봉향한다.

구계서원은 국가에서 지정한 사액서원이다. 1611년 창건되었다가, 1675년에 사액서원으로 지정됐다. 그러다 조선말에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31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구산사비는 매우 특별하여 보물로 지정받을 수 있는 자격 심의를 받았다.

서원 앞에는 1902년 연재 송병선이 지은 대관대 중수기가 비로 세워져 있다. 3년 후 그는 고종을 알현하고 조정에서 나오자 일경에 체포되어 집에 연금되어졌다. 그러자 그는 가족과 제자를 불러 앉히고는 “ 선비가 충성심이 부족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고, 부모에게 부끄러움을 주게 되었으니, 충효가 나에게 없구나. 이 자리에서 죽음으로 사죄하니 슬퍼하지 마라” 그리고는 가족과 제자 앞에서 사약을 마셨다. 

그의 선비정신이 이 비문에 남아서 구계서원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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