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삼천포의 성장 이야기 ‘마을이 도시로’ ②에히메촌

정부의 이주 권장에 삼천포 팔포 택한 일본 우치도마리
“경남의 일본인 어촌 가운데 가장 소득이 많았다”
참사 이어 대규모 자본가에 밀리며 고등어 건착망 포기
고용인과 피고용인, 지주와 소작농이란 씁쓸함 속 성장

'삼천포지명지'에 실린 것으로, 1921년에 통창 언덕에서 늑도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오늘날과 달리 팔포의 앞뒤가 모두 바다이다.
'삼천포지명지'에 실린 것으로, 1921년에 통창 언덕에서 늑도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오늘날과 달리 팔포의 앞뒤가 모두 바다이다.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삼천포의 성장을 주제로 지난날을 돌아볼 때 가장 주목할 시기는 1900년대 초반이다. 특히 1906년은 진주의 오랜 월경지(=행정의 관할 구역에서 떨어져 다른 군현 사이에 있는 땅) 신분에서 벗어난 해이면서 삼천포항이 지정항으로 분류돼 개항한 해이기도 하다.

한일병합조약(1910년)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삼천포항이 문을 열자 다양한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의 운명이 늘 그렇듯, 지배국 사람들에겐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삼천포에 몰려든 사람 중엔 어민들도 있었다. 당시 일본인 어민들에게 우리의 남해 연안은 ‘물 반 고기 반’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우리의 어업 기술은 뒤떨어졌고, 그들은 앞섰다.

일본 어민의 한국 바다 고기잡이는 1889년에 ‘조선일본양국통어규칙’이 체결되면서 본격화했다. 1908년에는 ‘한국어업법’이 공포되어 일본인은 한국인과 동등한 어업권을 누렸다. 일본 어민에게 한국 어장은 남획으로 망가진 일본의 어장을 대체하기에 알맞았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는 보조금까지 지원해주며 이들의 한국 집단 이주를 도왔다. 그 집단 이주지에는 삼천포가 포함돼 있었다.

일본 에히메현 우치도마리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이주해 살았던 팔포의 모습. 오른쪽 언덕이 통창 공원이다. 여기엔 에히메촌의 신사(神社)가 설치돼 있었다.
일본 에히메현 우치도마리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이주해 살았던 팔포의 모습. 오른쪽 언덕이 통창 공원이다. 여기엔 에히메촌의 신사(神社)가 설치돼 있었다.

일본인 지리학자 요시다 게이치(吉田敬一)가 1954년에 쓴 <조선수산개발사>라는 책에는 일본인의 삼천포 집단 이주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주지는 신수도와 팔포 두 곳이다. 신수도 이주어촌은 일본 오이타(大分)현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구성돼 오이타촌이라 불렸다. 1910~1911년에 5가구가 먼저 이주했고, 이후 21가구로 늘었다. 그러나 경영을 맡았던 오이타현 수산시험장이 폐지되면서 점점 세가 약해진 끝에 1919년에 해산했다.

반면에 팔포에 자리를 잡은 에히메촌은 일본 내에서도 대단히 성공한 이주어촌으로 평가받는다. 에히메촌은 에히메(愛媛)현 중에서도 아주 작은 우치도마리(內泊)라는 마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이들의 성공은 삼천포의 성장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에히메촌의 삼천포 이주와 정착에 관해선 독도재단의 김수희 박사가 쓴 <일제시대 경남 삼천포에 이주한 일본인 어민에 대해서>라는 연구 논문과 그의 책 <근대 일본어민의 한국진출과 어업경영>에 잘 나타나 있다. 여박동 계명대 명예교수가 쓴 <일제의 조선 어업 지배와 이주어촌 형성>이란 책에도 중요한 정보가 실렸다.

일본 우치도마리 주민들이 그려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에히메촌(옛 팔포)의 지도. 지금은 도심으로 변한 통창 북쪽이 갯벌로 표시되어 있다. 그 밖에 다양한 지역 정보를 담았다.
일본 우치도마리 주민들이 그려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에히메촌(옛 팔포)의 지도. 지금은 도심으로 변한 통창 북쪽이 갯벌로 표시되어 있다. 그 밖에 다양한 지역 정보를 담았다.

연구에 따르면, 일본 우치도마리 어민들은 1905년 무렵부터 한국 진출을 꿈꿔 왔다. 그해에 에히메현에서는 <원양어업 장려 보조 규칙>을 만들어 한국으로 출어하는 조합에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게 했다.

우치도마리라는 작은 어촌에서 서로 경쟁하기보다 한국으로 가자고 먼저 마음먹은 이는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 1861년생) 씨다. 이주어촌의 촌장이었던 그는 삼천포 주변 해역이 고등어 어장으로 훌륭하다는 정보를 파악하고선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 팔장포를 이주지로 정했다. 에히메현에선 인근 섬(신수도로 추정)을 추천했으나, 팔포 모래밭 주위로 고등어가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1911년에 12가구, 1912년에 12가구 등 처음엔 24가구로 시작했으며, 점차 더 늘었다. 정착지는 지금의 통창공원 서쪽 자락이다.

팔포에 자리를 잡은 에히메 사람들은 고등어잡이가 전문이었다. 당시는 일본에서 고등어 건착망이 막 도입될 때로, 이들도 멸치잡이 그물을 개조해 고등어잡이에 나섰다. 지금도 일본 우치도마리 마을에선 그물코가 3㎝인 건착망 어구를 ‘조선망’이라 부른다고 한다. 삼천포 에히메촌에선 망선 2척, 작은 배 3척이 하나가 되어 고등어를 잡았다. 삼천포 근해에서 어획물이 줄어들자 점차 방어진, 감포, 구룡포 등으로 멀리까지 나갔다. 어선이 기계식 동력선이 아닌 범선이었기에 이동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통창에서 본 팔포. 지금도 딴따이(團體)라는 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통창에서 본 팔포. 지금도 딴따이(團體)라는 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에히메촌은 초기 10여 년간 승승장구했다. 1921년 무렵, 경남의 일본인 어촌 가운데 가장 소득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신수도의 오이타촌이 해산할 때 남은 건물과 시설을 인수해준 쪽도 에히메촌이었다. 그러다 큰 시련을 맞는다. 1923년 4월 12일에 동해안 영일만으로 출어했다가 갑작스러운 돌풍을 만나 큰 해를 입었다. 배는 산산조각이 났고, 34명의 어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 기록은 ‘영일만 조난자 조혼비’에 새겨져 지금도 우치도마리 마을 한쪽에 서 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에히메촌의 어업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는다. 1928년 자료에 따르면, 에히메촌에는 당시 8척의 기선건착망이 있었지만 규모 면에서 하나같이 작았다. 대형 자본가들이 고등어 사업에 점점 뛰어들자 에히메촌은 1930년대에 들어 건착망 어선을 팔아버린다. 대신에 에히메촌 어민들은 전문 기술력을 인정받아 어로장, 선장 등에 고용되었다. 에히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정미소나 음식점 경영 등으로 사업 영역을 바꿨다.

에히메 사람들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삼천포에 살다가 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건물이 지금도 일부가 남아 있다. 동서금동의 통창공원 바로 서쪽 자락에 있는 건물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지붕이 넓고 길게 펼쳐진 건물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이다. 집의 생긴 모양에서 따온 이름은 나가야(長屋‧장옥)이고, 생활양식 면에서 불렀던 이름은 딴따이(團體‧단체)이다.

팔포에 남아 있는 일본식 집의 흔적. (위)팔포 주민 노삼석 씨가 한 지붕 아래서 여러 세대가 살았던 옛일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왼쪽) 부서진 시멘트 벽 너머로 나무 기둥과 흙벽이 보인다. (아래 오른쪽)일본식 지붕의 망와.
팔포에 남아 있는 일본식 집의 흔적. (위)팔포 주민 노삼석 씨가 한 지붕 아래서 여러 세대가 살았던 옛일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왼쪽) 부서진 시멘트 벽 너머로 나무 기둥과 흙벽이 보인다. (아래 오른쪽)일본식 지붕의 망와.

삼천포 사람들은 그중 후자에 꽂혔던가 보다. 딴따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마을주민들 사이에 널리 불린다. 딴따이는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하나의 연립주택인 셈이다. 실제로 지금도 남아 있는 한 딴따이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5가구가 모여 살았다. 다만 이제는 건물이 너무 낡아 사천시가 철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미 보상을 받고 집을 비운 가구가 여럿이다.

일본 우치도마리 마을에서 찾은 한 기록물에는 팔포의 옛 모습과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1920년생으로 추정되는 요시자와 지로(吉沢治郎) 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팔포에 자리 잡은 몇 년 동안 풍어가 계속돼 생활이 풍성했다. 당시 고등어가 얼마나 많았으면 “고등어 떼가 해면에 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고도 썼다. “물이 많이 나면 목섬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조개를 파거나 게를 잡고 놀았다”는 대목도 있다.

우치도마리 마을 어귀에는 1923년 4월 12일 조난 사고로 숨진 이들을 추모하는 '영일만 조난자 조혼비'가 지금도 서 있다.
우치도마리 마을 어귀에는 1923년 4월 12일 조난 사고로 숨진 이들을 추모하는 '영일만 조난자 조혼비'가 지금도 서 있다.

요시자와 지로 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은 팔포와 통창의 옛 모습을 가늠하기에도 충분하다. 이 그림으로는 지금의 삼천포중앙시장 일대는 모두가 갯벌이다. 한내천도 팔포를 관통하지 않는다.

고등어 건착망 어업에 특기를 보인 에히메 사람들은 삼천포 토박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줬을 터다. 무엇보다 건착망 어선에 함께 탔다. 다만 한국인들에겐 주로 잡일을 맡겼다. 배마다 1~2명의 한국인이 탔으며, 매달 24엔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인 여성들은 그들의 집안일을 사실상 전담했다. 에히메 사람들이 사들인 논과 밭은 한국인이 대신 농사를 지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을 관계였겠지만, 이것도 엄연한 삼천포의 역사다.

일본 에히메현 우치도마리 마을의 오늘날 모습. 아주 작은 어촌으로 남아 있다.
일본 에히메현 우치도마리 마을의 오늘날 모습. 아주 작은 어촌으로 남아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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