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2000년 11월 14일, 강원도 정선군의 민둥산역과 구절리역을 하루 2회 오가던 차량 1량짜리 꼬마열차가 기어코 운행을 멈추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납니다. 비둘기호가 마지막으로 퇴역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비둘기호는 1957년 보통열차에서 출발했으며 1967년에는 3등 열차라 불렸습니다. 1984년 철도청은 노선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부르던 이름들을 등급에 따라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로 정리하였습니다. 차창 틀의 우유색 빛깔과 위아래의 파란 색이 인상적이었던 비둘기호는 작은 역까지 빠짐없이 정차하는 최하위 등급의 완행열차였습니다. 시골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주요한 이동 수단이었습니다.  

나는 1970년 대 중반 부산에서 비둘기호를 타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아침 10시, 동래역을 떠난 열차는 역이란 역은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섰습니다. 한술 더 떠 우등 열차가 뒤따라올 때마다 10분이고 20분이고 기다렸다가는 앞세워 보내고 다시 느릿느릿 제 길을 걷듯 달렸습니다. 이런 느리광이는 두 번 다시없을 겁니다. 열차 안에서 무더운 한낮을 보내고 저녁놀마저 사라진 지 오래. 어디론가 한참을 더 가더니 이윽고 자정을 넘겨, 한 시가 훌쩍 지나서야 칠흑 같은 어둠 앞에 멈췄습니다. 연무대역이었습니다. 그렇게 밟은 땅 논산. 당시 누군가 논산이 서울보다 가깝다고 생각하여 비둘기호를 탔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엄청난 오판인지 열차 출발 후 머지않아 깨달았을 것입니다.  

비둘기호만의 낭만도 있었습니다. 정거장은 물론이고 역무원은 없고 역 간판만 있는 간이역 그리고 간판마저 없는 무명 간이역까지 멈췄다가 떠납니다. 마을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잠깐 멈춤 없이 무정스레 통과했다면 목숨을 걸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부산을 떠나 한림정역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실제 뛰어내리는 사람을 나는 여러 번 봤습니다. 

지정석이 없던 비둘기호는 사계절 아침저녁으로 통학생들과 서민의 애환을 실어 나르는 마당발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추억의 진삼(진주-삼천포)선 또한 그랬습니다. 1953년 사천비행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진주 개양에서 사천까지 10.5km 구간을 이었고, 1965년 사천에서 삼천포까지의 철길을 개통하여 마침내 개양에서 동금동 삼천포역까지 29.1km의 진삼선을 완공했습니다. 이후 운행 적자가 쌓이면서 예하역, 노룡역 등 간이역을 폐지했고, 이어 금문역, 죽림역이 문을 닫으면서 끝내는 1990년 열차 운행을 전면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진삼선은 불과 24년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국고속철도KTX를 이용하여 서울과 부산을 2시간 30분에 오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잊혀 가는 추억을 아름답다 되뇌어도 아름다움만으로 간직하기엔 아쉬움이 깊고 그리움이 너무 뜨겁습니다. 정공채의 시 「간이역」 끝부분을 읊조리며 씁쓸함을 달랩니다.

“(줄임) 이제 꽃은 지고/ 지는 그 꽃에 미련은 오래 머물지만/ 져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는 걸. (줄임)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가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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