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곤양 성내리

식물로서는 사천의 유일한 천연기념물인 곤양 성내리 비자나무. 곤양읍성 안 관아 터에서 300년 세월을 살아왔다.
식물로서는 사천의 유일한 천연기념물인 곤양 성내리 비자나무. 곤양읍성 안 관아 터에서 300년 세월을 살아왔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다솔사 다녀오는 길에 곤양 성내리 비자나무를 찾았다. 푸르게 늠름한 두 그루 단정하게 서 있다. 식물로서는 사천의 유일한 천연기념물이란다. 비자나무는 주로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제주도나 전라남도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경상남도에는 자생지가 귀하다고 한다. 그런데 성내리 비자나무는 여기 300년 세월을 살아온 거다. 문화적으로 관아에서 심은 흔치 않은 수종이고, 생물학적으로는 자생지가 귀한 장소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그러하니 더욱 귀하게 대접할 수밖에. 남들과 비슷하거나,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흔하거나, 독특한 개성이 없으면 천연기념물 반열에 오르기 힘들 테다.

비자나무 밑둥치.
비자나무 밑둥치.

가까이 다가가 비자나무 아래 섰다. 몸통이 굵고 앉은 자세에 중심이 잡혔다. 땅 위에는 윤택하고 축축한 습기가 피어오른다. 이런 곳이 비자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란다. 고개 들어보니 늘푸른 바늘잎 끝에 노랑연두 햇잎이 웃음 짓는구나! 굵은 몸통 벗겨진 껍질 사이로 졸참나무 씨앗 하나 움터 나왔다. 자리를 잘 못 잡은 생명의 고단함이 운명처럼 드러나 보인다. 나를 지탱하는 바탕의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으니, 알아차려야겠지? 우리의 바탕은 거시적인 것(지구 영역)에서 미시적인 것(개인 영역)까지 중첩으로 겹쳐있다.

비자나무에 붙은 햇 졸참나무.
비자나무에 붙은 햇 졸참나무.

조선 시대 곤양읍성 아담한 관아 터 주변에는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굵직하게 서서 옛 관청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성내리 비자나무는 관아에 기념 식수를 했던 것 같다. 비자나무는 느티나무처럼 듬직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자라지도 않는단다. 그런데 이 나무를 심은 까닭은 무엇일까? 파격적이고도 참 흥미로운 사례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서니 대밭이 눈길을 끈다. 저 뒤편에서 들이치는 햇살에 대쪽 같은 대나무의 성질이 더욱 돋보인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대나무를 제쳐두고 나무의 곧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대밭 풍경.
대밭 풍경.

길가 풀숲에는 염주괴불주머니가 피어서 노란 입술을 호호 불고 있다. 꽃이 지면서 매달리는 열매가 꼭 염주를 닮아있다. 그런데 이 집안에는 걱정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산괴불주머니도 똑같은 염주를 만들고 있으니. 하지만 염려 마시라! 냄새에 걱정을 날려줄 답이 있으니까. 잎줄기에서 역한 냄새가 나면 염주괴불주머니, 안 나면 산괴불주머니란다. 예전에 냄새가 많이 나서 뱀풀이라 불렀던 것이 염주괴불주머니였구나!

염주괴불주머니.
염주괴불주머니.

궁금증을 참지 못해 ‘괴불주머니’를 검색해 보았다. 예전에 어린아이의 옷에 차던 ‘괴불주머니 노리개’란 게 있었다. 이게 꽃 모양하고 그럴싸하게 닮았다. 농경시대를 살아온 조상님들은 자연을 살펴보아 생활 속에다 옮겨놓았구나!

계단을 훌쩍 오르니 오래 묵은 팽나무 한 그루 정자나무처럼 반겨준다. 살짝 굽은 둥치가 우람하면서도 운치 있는 나무다. 발치에는 염주괴불주머니가 피어서 노란 꽃밭을 이루었다. 예전에는 흔하디흔한 고향의 풍경이었겠지만, 지금은 귀한 풍경이 되었다. 예스러운 멋을 지닌 마을의 풍경 한 조각! 거기 먼~ 고향의 동심도 함께 잠들어 있다.

팽나무와 염주괴불주머니 풍경.
팽나무와 염주괴불주머니 풍경.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오는 길에 한 무리의 애기똥풀을 만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억척같이 꽃을 피우는 강인한 귀화식물. 노란 꽃을 한껏 피워놓고 실바람 따라 소곤소곤 노래를 부른다. 애기똥풀의 까만 씨에는 엘라이오좀이라는 영양 덩어리가 붙어 있다. 개미는 훌륭한 먹이가 되는 이 씨앗을 가져가지만, 사실 애기똥풀이 의도를 갖고 개미를 움직인 것이다. 엘라이오좀은 ‘나의 후손을 퍼뜨려 달라’는 거절하기 힘든 애기똥풀의 선물이거든.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 움직이는 곤충을 제어하는 이 지혜로움! 동(動)이 정(停)에게 허를 찔렸다, 비자나무 기념 식수처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무엇에 허를 찔리고 있을까? 새로운 답은 늘 네모난 틀 밖에 있다.

애기똥풀.
애기똥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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