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등기부등본에 ‘신탁 경고’ 더 자세히 명시해야

10일 오후, 공매에서 무사히 자신들의 집을 낙찰 받은 사기 분양/임대 피해주민들이 손을 잡으며 서로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신탁'이란 제도에 자신들이 희생됐다는 생각에 이내 서글퍼했다.
사기 분양/임대 피해를 입은 사천의 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10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대의 공개매각에 응해 대부분 낙찰을 받았다.

이미 치른 집값이 있음에도 다시 분양을 받는 심정이 오죽할까. 그럼에도 ‘살던 집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절박함에 공매가 진행되는 동안 피해주민들은 노심초사 하는 모습이었다.

입찰자가 자신들 밖에 없음을 확인한 피해주민들은 그 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잔뜩 긴장했던 얼굴도 조금은 풀렸다. 공매장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함과 동시에 “다 같이 함께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해야지.”

누군가 내뱉는 이 말에 다들 흔쾌히 동의했지만, 속은 여전히 쓰리던지 술잔을 마음껏 부딪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한 피해주민이 공매현장을 빠져나오자 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떼인 분양금과 전세금도 빚인데, 다시 은행 대출을 받고 그 원금과 이자 갚아 나갈 생각을 하면 얼마나 아득할까. 실제로 한 피해주민은 공매현장까지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다. “다시 대출 받으면 이자 갚는 데 생활비를 다 써야 할 판인데, 차마 엄두가 안 났다”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이제 “급한 불은 일단 껐다”는 게 피해주민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는 않을 분위기다. 자신들을 속인 업체는 망하고 없지만 그 업체와 신탁계약을 맺은 신탁사에 어떻게든 책임을 묻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 신탁회사가 사기 분양을 저지른 업체의 잘못을 미리 알고도 이를 적극 제지하지 않았음을 들고 있다. 일부 주민은 지난해 말에 해당 업체가 의심스럽다며 신탁회사에 제보했으나, 그 뒤에도 2건의 계약이 더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실상 두 업체가 짜고 저지른 사기’라고 의심하는 눈치다.

이런 의심에 신탁회사는 지금까지 적극 대응하지 않고 있다. 신탁회사로서는 문제의 업체가 피해주민들과 어떤 계약이 오가는 지 알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책임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따라서 피해주민들은 법률 자문을 받아본 뒤 신탁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기본 입장을 세우고 있다.

피해입주민들만 공매에 응해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 이들은 공매장소의 출입문이 잠기자 그 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신탁이란 게 도대체 뭘까’하는 궁금증이 나올 법하다.

사실 ‘신탁’이란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 시민들은 적을 듯하다. 얼핏 들으면 ‘어떤 재산권 행사에 있어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한 추가 안전조치’ 쯤으로 이해된다. 이 아파트 피해주민들도 “신탁회사와 계약이 돼 있기 때문에 전세권 설정이 굳이 필요 없다”는 분양업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신탁’이 안전장치이긴 한데, 입주민을 위한 안전장치가 아니라 은행이나 신탁회사를 위한 안전장치라는 점이다.

재산 소유자가 은행에 돈을 빌리면서 그 돈을 못 갚을 경우에 대비해 신용보증인을 세우고, 그 신용보증인에게 재산관리권을 맡겨 놓은 셈이다. 즉 여차하면 신탁회사나 대출 은행으로 재산권이 넘어간다는 얘기지, 최종 소비자인 아파트 입주자들을 위한 안전장치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 ‘신탁’은 일부 법무사나 관계공무원들도 “잘 모른다”고 답할 만큼 낯선 용어인가보다. 그런데도 토지의 등기부등본에는 신탁의 지정 여부만 표기돼 있을 뿐, 주의나 경고문이 따로 없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일을 불렀고, 또 제2, 제3의 분양/임대 사기가 반복 될 여지를 제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공매가 시작되기 전, 한 피해주민이 '생존권사수'라 적힌 띠를 팔에 묶은 채 공매 공고문을 다시 한 번 읽고 있다.

따라서 만약 등기부등본에 ‘이 땅(건물)에는 부동산담보신탁계약이 체결돼 있으니 신탁원부를 꼭 확인하라’는 경고문만 들어 있었어도, 이번과 같이 1년6개월이란 장기간에 걸쳐 30세대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분양/임대 사기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 나올 법 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계기관이 나서서 곰곰이 따져볼 만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천에서의 이번 아파트 사기 분양/임대 사건은 이제 피해주민과 신탁회사 사이에 책임공방이 남았다. 주민들로선 신탁회사에 관리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신탁법 제28조에서 “수탁자는 신탁의 본지에 따라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신탁재산을 관리 또는 처분하여야 한다”라고 한 의무조항을 문제 삼아, 관리의 의무가 부족했음을 지적할 요량이다. 여기서 수탁자는 곧 신탁회사를 말한다.

그러나 상대는 이른 바 이 분야에서는 ‘프로’. 웬만한 법률전문가라 해도 그들의 잘못을 들춰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어서, 소송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신탁이란?
위탁자가 특정한 재산권을 수탁자에게 이전하거나 기타의 처분을 하고, 수탁자로 하여금 수익자의 이익 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그 재산권을 관리/처분하게 하는 법률관계

공매가 끝난 뒤 은행대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무거운 표정으로 돌아간 피해주민들. 신탁회사에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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