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허를 찌른 「착하다」와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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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허를 찌른 「착하다」와 「미치다」
  • 송창섭 시인
  • 승인 2020.04.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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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언어는 태어나면서부터 언중에게 시달립니다. 풍랑과 역경을 견뎌낸 언어는 원형 그대로 혹은 약간 변형되어 쓰이지만, 주목을 끌지 못한 채 푸대접 받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생명을 마치기도 합니다.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음운, 어휘 등에서 신생, 성장, 소멸하는 특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언어 세계의 비정한 불가피성을 두고 언어의 삶 또는 역사성이라 이릅니다. 

언어란 그 뜻과 기호를 정하고 나면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들 모두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강제성을 띨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약속인 셈이지요. 같은 사물이나 대상을 두고 각기 다른 낱말을 쓰게 된다면 의사소통을 올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식이 바뀌고 생활 습성이 달라지고 과거에 없던 물건이 나오거나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면서, 전혀 낯선 개념의 말들이 등장하고 기존에 써 왔던 단어의 형상이 바뀝니다. 특정 계층이나 지역, 집단이 쓰는 은어, 비속어, 정보화나 사회 현상에 따른 신조어도 등장하지요. 의미의 가감 또한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고요. 

《용비어천가》 125장 중 최고 명창으로 꼽는 제2장을 보겠습니다.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ᆞㅣ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 ᄉᆞㅣ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ᆞㅣ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현대어로 옮기겠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습니다 /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로 갑니다”

순수 토박이말이 풍기는 감촉의 편안함을 맛보면서, 훈민정음과 현대어를 대비해 보겠습니다. ‘불휘-뿌리, 남ᄀᆞᆫ-나무는, ᄇᆞᄅᆞᆷ-바람, 뮈다-흔들리다, 곶-꽃, 됴타-좋다, 여름-열매, 하다-많다, 믈-물, ᄀᆞᄆᆞᆯ-가뭄, 바ᄅᆞᆯ-바다.’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낱말도 있지만 전혀 다른 꼴로 바뀐 것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굵직한 대형 상점들이 심심찮게 할인 판매 광고를 합니다. 전단지까지 만들어 곳곳에 붙임으로써 효과의 극대화를 노립니다. 그 내용을 볼라치면 언어 파괴랄까, 아니면 언어 변신, 언어 상처, 언어 마법이랄까 아무튼 특이한 표현들이 눈에 띕니다. 

그러니까, ‘착한 가격’, ‘미친 가격’ 같은 문구들이지요. ‘착하다’란 말은 본디 ‘마음씨나 행동이 바르고 어질다, 선善하다, 사람이나 그 마음이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는 의미로 씁니다. 그런데 2000년 대 후반 한 회사가 화장품을 선전하면서 ‘착한 가격! 착한 품질!’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문구는 널리 퍼졌고, 그 힘을 업어 ‘착하다’는 ‘품질이나 성능에 비해 물건의 값이 싸다.’란 또 다른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이를 비유적 확장이라 하여 틀린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모호한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미치다’란 말은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언행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다,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지나치게 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다, 상식에 지나치게 벗어난 행동을 하다, 어떤 일에 지나칠 정도로 푹 빠지다’ 등의 의미로 씁니다. 그런데 가격 앞에 덥석 이 말을 붙였으니 보는 순간 정작 무엇이 미친 건지 혼돈스러웠습니다. 

그로부터 ‘착하다’는 ‘부드럽다’라는 이미지를, ‘미치다’는 ‘강하다, 흠뻑 빠지다’라는 설득력을 앞세워 서로 차별성을 두면서, ‘형편없이 싸다, 터무니없는 가격이다’라는 의미의 동질성으로 언중들의 의식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의 허虛를 찔러 소비자들의 심리를 흔들고는 구매 욕구를 끌어내려는 상업적 싱크탱크think tank(두뇌 집단)의 계략이 은밀하게 숨어 있었던 광고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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