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4 토
사회
어디서나 누구나…사천사람들은 용감했다<기획> 3‧1의거 100주년 ‘사천의 독립만세운동’
하병주 기자  |  into@news40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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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9  10: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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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19년 3‧1의거(만세운동)가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 경남 사천에서도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힘찼다. 일제 헌병의 서슬 퍼런 통제와 감시에도 이를 뚫고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여기엔 지식인뿐 아니라 학생과 상인, 농민, 노동자들까지 함께했다. <뉴스사천>은 3년 전 ‘인물로 보는 사천의 3‧1운동’이란 특집기사로 1919년 3월의 기억을 되살린 바 있으나, 올해는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사천문화원이 최근 사천항일독립운동사를 발간했으므로, 그때의 함성을 다시 한 번 기록한다. 사천항일독립운동사와 사천시사를 참고했다.

사천 3‧1운동의 시작 ‘곤양의거’

사천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곤양면이다. 곤양면 송전리 출신의 김진곤(金鎭坤‧1890)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곤양 장터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는 송전리 청년 4명과 함께 거사 날을 곤양 장날인 3월 13일로 정하고, 곤양공립보통학교(昆陽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와 깃발을 준비했다. 그는 거사 당일에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곤양주재소에 투입한 뒤 주민·학생들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6일과 19일에도 군중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사천헌병분대에 붙잡혀 징역6월의 옥고를 치렀다. 13일 곤양의거는 진주의거보다 5일, 사천읍의거보다 8일 빠른 것이었다.

   
▲ 사천초등학교에서는 매년 3월 21일 사천읍 독립만세의거 재현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사천DB)

축구경기에서 터진 “독립만세”

사천읍의거는 당시 천도교 사천군교구 책임자이던 장태영(張台永‧?)이 서울 천도교총본부에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오면서 싹텄다. 그는 강대창, 황순주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여기엔 박기현, 김종철, 임순백, 윤수상, 김성언, 이윤조 등이 동참했다. 이윤조는 당시 사천공립보통학교의 졸업반 학생이었다.

거사일은 이 학교 졸업식이 있던 3월 21일이었다. 졸업식 후 가진 축구시합에서 이윤조 편이 이기자 이윤조는 가슴속에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 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은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나왔다. 이에 주민들도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를 주도한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 등은 스승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모여 “우리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살육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철퇴하라”라고 쓴 종이를 돌멩이에 묶어 사천헌병 분대장 집에 던져 넣었다가 출동한 헌병대에 박기현이 붙잡혔다. 그는 고문을 당한 후 진주감옥에서 징역3월형을 살았다.

   
▲ 100년전 사천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선각자들. 맨 윗줄 왼쪽에서부터 강대창, 장태영, 강금수, 김우열, 장지린, 박상진, 박종실, 손우상, 고광세, 최범술.

삼천포장날에 울려 퍼진 함성

3월 29일 일어난 삼천포의거에는 남양 출신의 박종실(朴琮實‧1890)이 중심에 있었다. 그는 진주로 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뒤 장지린, 황병두(삼천포공립보통학교 교사) 등과 모의했다. 다시 김우열, 강금수, 장지제, 고광세 등을 포섭해 학생, 청년, 일반면민 3개 단위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거사일을 25일로 잡았다. 이날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있는 날이자 삼천포장날이기도 했다.

당일 학생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먼저 함성을 질렀다. 예정보다 조금 빠른 진행이었다. 이 과정에 학생 간부이던 박상윤, 박종대, 박상진 등이 검거됐다. 뒤이어 제2대의 청년대는 시위장소를 장터로 옮겨 강금수(姜今秀‧?)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박종실, 장지제, 강천수, 손우상, 고광세, 김우열이 앞장섰다. 일반 군중들도 가세한 가운데 김기문, 박두수, 이계철, 이욱래, 강상조, 장지린 등이 한 축을 이루며 용진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헌병대에 붙잡힌 이들 대부분도 고초를 겪고 징역형이나 태형을 선고 받았다.

만세 그리고 탄압, 곤명‧서포‧사남

4월 5일 곤명면의거는 금성리 시골 선비 이영근(李永根‧1894)의 주도로 서당훈장 정원주, 주민 문형근‧조개석‧조관석‧강재빈‧이규현‧이규필 등 200여 명이 덕천강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일이다. 이로 인해 이영근은 고문과 태형을 맞고 풀려났으나 장독으로 1922년에 숨졌다. 이규현도 태형 후유증으로 숨졌다. 4월 17일엔 곤명면 정곡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었다. 주민 김경찬 등이 완사 주민들과 옥녀봉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주동자들은 헌병대의 탄압을 받았다.

서포면에선 4월 10일과 16일 두 차례 만세시위가 있었다. 여기엔 개진학교(서포초등학교의 전신) 학생과 주민 100여 명이 참여했다. 송지환, 신영범, 임응주, 송찬홍, 이주효, 송용수, 박우미동, 최범술 등이 주도했다. 당시의 일을 기록한 기념비(1968년 제작)가 서포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사천읍 두량리에 살던 류승갑(柳承甲‧1892)은 4월 14일 당시 읍내면 중선리에서 도로 보수 공사를 마친 뒤 같은 마을 손계묵, 하말금 등과 함께 “왜놈들에게 나라와 주권까지 모두 도적맞고 우리는 또 이렇게 강제 부역으로 혹사까지 당하고 있느니 이 얼마나 원통하냐”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주민 36명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고, 그 중 손계묵은 끝내 숨졌다.

사남면에선 4월 중순 어느 날 우천마을 청년들이 일본 헌병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산에서 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7명이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독립선언서 보급한 최원형‧최범술

사천의 3‧1만세운동을 논함에 있어 최원형(崔垣亨‧1901)과 최범술(崔凡述‧1904)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큰 역할은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보급한 일이다.

최원형은 곤양면 맥사리(옛 서포면 소속)에서 태어나 1919년엔 경기고보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서울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간직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 당시 해인사 지방학림의 학생이던 최범술(=효당스님) 등에게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최범술은 서포면 금진리 율포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 곤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다솔사에 출가한 뒤 같은 해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했다. 최원형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1만여 매 인쇄해 사천은 물론 진주, 합천, 의령, 하동, 대구, 경주 등에 나눠주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활동이 발각되어 곤양헌병분대에 끌려갔으나 나이가 만 15세가 되지 않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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