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배우 김혜수를 보았다. 한동안 뜸하더니 미국생활이라도 한 것일까. 오랜만에 극장에 나타난 그녀의 영어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국가부도의 날. 초등 6학년 아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집중해서 보는 것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아들의 성장 때문인지 모르겠다. “영화가 어렵지 않더냐”는 아빠의 질문에 “채권자와 채무자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응, 채권자는 특정인에게 특정한 행위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고, 채무자는 그 권리에 대응할 의무를 진 사람이야.”

아들은 더 어렵다면서 관심을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옮겨간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은 아빠의 설명은 이어진다.

“예를 들어, A가 자신의 집을 B에게 팔았다고 치자. 그럼 A는 B에게 매매대금을 달라고 하는 금전채권을 가지고, 반대로 B는 A에게 그 집의 소유권을 넘겨달라는 등기청구권이라는 채권을 가지게 되는 거지. 상대방은 각 채권에 대응하는 채무를 지는 거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들과의 대화는 여기가 끝이다.

IMF 관계자와의 협상과정에서 굴욕적인 요구조건을 전적으로 수용하려는 재정부 차관에게 극중 김혜수는 말한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1910년 한일합방 때도, 1963년 한일협상 때도 망해가는 봉건왕조 조선을 위해서, 가난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결정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극중 차관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어린 이병헌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추노꾼인지, 이병헌을 도운 역관인지, 암튼 그 역을 맡은 너무나 닮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저 차관이다.

영화에서 그는 말한다. 이참에 IMF의 힘을 빌려 걸핏하면 파업하는 노동자들 싹 쓸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일본군을 불러들여 동학군을 쓸어버린 민비가 떠오른다. 미제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1명을 죽이기 위해선 화승총을 든 동학군 1000명의 목숨이 필요했다.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조선이 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도 1997년 IMF 구제금융시기를 전후하여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그나마 정착된 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제도와 시민의식,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현실화 등으로 저 차관이 꿈꾸는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까지는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은 그 내용이 어느 쪽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대로는 실현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한. 영화감독이 작심이라도 한 듯, 장황한 설명이 김혜수의 대사로 처리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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