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롱나무꽃.

배롱나무가 한창이다. 한지를 쭈글쭈글 구겨 만든 것 같은 진분홍 배롱나무 꽃. 한여름에서 가을까지 최소 100일을 도로가나 집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름은 모를지라도 꽃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배롱나무 관련 시가 있다. 시인의 이름은 귀에 익은 도종환, 현 문화체육부 장관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TV에서 자주 만나는 분이라 이분이 시인이었나 싶지만 여전히 그의 시는 주옥같다.

백일홍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이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시인은 배롱나무의 특징을 꿰뚫고 있다. 한 꽃이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게 아니라 이웃 꽃송이들과 피고 지고를 거듭하여 100일 동안 핀다는 사실을.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이다.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다 하여 중국에서는 ‘자미화’라고 한다. 따뜻한 곳에서 잘 자란다. 백천사로 가는 길에도, 초전공원 산책길에도 피어있다. 통영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가로수로 심어 놓은 배롱나무를 이어 만날 수 있다.

보통은 꽃이 없고 나뭇잎마저 다 떨어진 겨울이면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아니다. 껍질이 특이해 겨울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흰 얼룩무늬 같은 게 있고 껍질이 반질반질하다. 모과나무 껍질의 4촌정도 된다고나 할까. 껍질의 반질반질함 때문에 ‘간지럼나무’라고도 하고, 일본 사람들은 나무 잘 타는 원숭이도 떨어질 만큼 껍질이 미끄럽다고 하여 ‘원숭이 미끄럼나무’라 부른다. 때로는 나무이름 참 쉽게 짓는다 싶을 만큼 친숙한 나무 이름을 가졌다.

배롱나무에도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바닷가 마을에 해룡이 자주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해룡을 달래기 위해 해마다 처녀를 재물로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재물로 바쳐질 운명의 처녀를 대신하여 이웃 마을 젊은 총각이 해룡을 물리치고 오겠다며 용감히 바다로 나갔다. 100일 안에 돌아오겠다던 총각을 기다리던 처녀는 총각이 해룡에게 죽임을 당한 줄 알고 약속한 100일을 며칠 앞두고 결국 죽고 만다. 죽은 자리에 나무 한그루가 자라나니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일홍나무’ 또는 ‘나무백일홍’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도 배롱나무가 소개되어 있는 걸 보면 배롱나무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올라간다. 으레 정자 옆에 한 그루쯤 심었으니 선비들도 이 꽃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배롱나무가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나무껍질이 매끄럽고 살이 없어 앙상한 뼈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불길하게 여긴다. 짐작컨대 4‧3항쟁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여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배롱나무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 함’이다. 아픈 역사의 희생양이 된 먼저 간 이를 그리워하는 걸까, 아니면 지난 여름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 뜨거운 여름은 피하고 싶다. 길을 가다 배롱나무를 만나게 되면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무껍질도 한번 만져보시라. 한지를 쭈글쭈글 구겨놓은 듯한 모습인지, 나무가 간지름을 타는지....

▲ 박남희 (숲해설가 / 교육희망사천학부모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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