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삼천포여고 교장 / 시인

지난 글에서는,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권투 경기에서 파생한 사전오기四顚五起의 정신과 가치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 두 사람이 빚은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을 바탕으로 한 끈끈하고 숭고한 우정에 대해 음미해 볼까 합니다.

어떤 경기든 선수로 참가하는 이들은 특히 강한 승부욕을 불태웁니다. 근성이 충만해야만이 엄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분노한다면 결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어떤 일이든 상대에 지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본받을 만한 선수는 정작 이겼을 때보다 졌을 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차피 한 쪽이 이기고 한 쪽이 져야만 끝이 난다면 그 결과는 준엄하고 냉정합니다. 이 때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상대의 승리에 찬사를 보내는 자세는 참된 경기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경기가 끝난 후 서로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격려와 위로를 하는 마음이지요.

고대 로마가 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에서 패할 때마다 적군의 뛰어난 전술을 수용하고 훌륭한 무기를 모방하여 더욱 강한 무기로 다듬었기 때문입니다. 쉬이 포기하거나 낙망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적일지라도, 배우는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게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지는 것을 우아하고 겸허하게 인정하는 태도는, ‘사전오기’에서 일어난다는 ‘기’보다는 넘어진다는 ‘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굳은 집념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곧 부도옹不倒翁 이른바 오뚝이 정신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용하려면 용기와 신념이 필요합니다.
 
지난 11월 27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는 ‘4전5기 챔피언 홍수환 4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엔 매우 특별한 인물을 초청하여 자리를 함께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현재 파나마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엑토르 카라스키야였습니다. 자신의 11연속 KO승을 저지하고 첫 패배를 안긴 홍수환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의 기념식장에 이를 축하해 주러 먼 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작은 일에도 앙심을 품고 평생 원수로 지내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런 마당에 카라스키야의 방한은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당시 경기에 패했지만 참으로 훌륭한 선수요 존경 받을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승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지역을 넘어 그는 진정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인 홍수환을 축하해 주러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그의 용기와 소신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참으로 부러운 자산입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갖은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때론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합니다. 유명한 테니스 선수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테니스 라켓을 땅에 패대기치고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장면을 가끔 봅니다. 무엇이 스포츠맨십이며, 무엇이 진정 승자이고 기쁨의 길일까요. 소크라테스의 말로 흐트러진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 보면 좋겠습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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