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 영화 <이퀄스>의 포스터.ⓒ 씨네그루

미래로 갈수록 덜 먹고 덜 자고 덜 꿈꾼다. 덕분에 문명은 진일보 하고 생산성은 향상된다. 하지만 감정은 통제된다. 마치 SF 문법처럼 각인된 이러한 설정을 <이퀄스>는 아주 정직하게 적용한다. 영화는 감정이 통제된 미래 사회답게 온통 희고 푸르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예상치 그대로 붉은빛이다. 스토리가 참신하거나 구성이 쫀득하거나 액션이라도 화려하면 이 모든 단점이 스스로 묻혀 흐를 텐데 문제는 너무 느리고 단조롭다. 무엇이든 너무 반복하면 지겨워지는 법, 매혹적인 흰색의 클리셰마저 빛을 잃는다.

그 와중에 OST 만큼은 두근두근 심장을 두드린다. 의도한 음표 하나에도 가슴이 떨리는데 감정이 없는 미래사회라니. 그래서 SF는 현실에 대한 은유이며, 로맨스는 대리만족이란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요즘 같이 억압과 통제라는 단어를 절실하게 느끼는 시기에 로맨스라는 탈출구마저 없다면 세상살이에 낙이 없을 것 같다. <이퀄스>는 딱 그 정도 수준이다.

문득, 헐리웃 블록버스터 SF에서 이야기하는 근 미래는 거의 대부분 감정마저 통제된 사회다. 얼추 Young Adult 문학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로이스 로우리의 <더 기버>, 로렌 올리버의 <델리리움 트릴로지>와 같이 비슷한 배경을 가진 작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왜 미래사회는 감정을 소거하려 든다는 걸까?

자원이 제한된 세상은 윈-윈 게임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이 될 수밖에 없고, 개인의 이기심이 극대화되면 그 반동으로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애초에 불만조차 제기할 수 없도록 이기심을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도 때로는 이기심의 탈을 쓰고 있으니 당연히 사랑은 소거해야 할 질병일 뿐이다. 그러니 사랑마저도 느낄 수 없도록 통제를 하자. 어떻게?

제러미 밴덤이 제안한 원형감옥 Panopticon은 감시와 통제다. 공리주의자였던 그의 철학대로 ‘최소한의 비용 및 감시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걸 확장시켜 미셀 푸코는 근대 권력의 속성을 설명하였고, 조지 오웰은 ‘빅 브라더’를 창조해 냈다. 다만 권력기관은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보호’라고 예쁘게 포장해낸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처럼 근 미래의 사회는 개성이 말살된 Distopia가 될 것이라는 걸 예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