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분향소’에서 ‘다 함께 분향소’로 이어진 48시간

'승용차 분향소' 48시간 만에 추모위원회 이름의 시민 분향소가 차려졌다. 강기갑 의원 보좌진과 민노당 관계자가 분향하고 있다.

‘바보 노무현’의 죽음에 유난히 눈이 빨개졌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토요일인데도 일 때문에 회사에 나왔다가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온 몸에 맥이 풀렸다고 합니다. 남은 일을 미룬 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송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렸답니다.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쓴 소주 생각이 났답니다. 그런데 소주 한두 잔이 들어가니 술맛도 달아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뭔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습니다. ‘분향소를 차리자!’

23일 밤 자신의 승용차를 배경으로 홀로 분향소를 차리고 있는 한 시민.

경남에서 나고 자란 노무현이지만 그를 사랑하고 지지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가 사는 사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분향소 하나 차리지 못할 정도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지인들에게 뜻을 전했지만 “천천히 뜻을 모아보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 보관하던 노 전 대통령의 사진과 태극기, 초와 향로 등을 챙겨 무작정 승용차에 실었습니다. 흰 국화도 한 아름 샀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한 교차로 귀퉁이에 차를 세우고 분향소를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평소 아는 사람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25일 밤에도 여러 시민들이 '승용차 분향소'를 찾았다.

분향소가 차려지자 추모객이 간간이 찾았습니다. 백발의 노인부터 어린 애들까지 나이는 불문입니다. 그러나 어디처럼 길게 줄을 서거나 안내자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하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고인이 그렇게 뛰어넘고자 했던 ‘지역의 벽’이 여전했던 탓일까요?

그는 다음날 저녁에도 전날처럼 홀로 승용차를 배경으로 같은 장소에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이 상황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의 지인들 마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퍼졌습니다. 어디서든 조직적으로 나서겠지 생각했던 자신들을 책망하며 셋째 날 저녁에는 함께 모였습니다.

새 분향소로 분향 물품들을 옮기고 있는 시민들.

‘승용차 분향소’가 사흘째 진행되는 동안 모인 사람들은 길 건너편에 더 넓은 장소를 구해 천막을 치고 전기를 넣고 자리도 깔았습니다. 큰 영정사진도 준비했습니다. 비용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나눴습니다.

밤10시20분이 되자 겉모양이 다 갖춰졌습니다. 이제 ‘승용차 분향소’에 있던 화환과 향로 등을 옮길 차례입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임시 분향소에 차려졌던 물건을 손에 하나 씩 들고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그러니 순식간에 그럴듯한 분향소가 차려졌습니다. 건너편에 있던 ‘승용차 분향소’에 비하면 전문장례식장 수준입니다.

여러 시민의 참여로 새 분향소는 금방 모양을 갖췄다.

어두워 고인의 영정도 제대로 뵈지 않던, 그래서 길을 가던 누군가는 “새 차에 고사지내는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던, 어떤 이에겐 초라해보였지만 ‘그’에게는 절대 초라하지 않았던 ‘나 홀로 분향소’가 ‘다 함께 분향소’로 거듭남과 동시에, 분향소에 불이 켜지는 순간이었습니다.

48시간 만에 ‘나 홀로 분향소’가 ‘다 함께 분향소’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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