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문화원 주최‘사주 승격 1000년 학술세미나’정리

사천문화원이 제20회 ‘시민의 날’과 ‘와룡문화제’에 즈음해 ‘사주 승격 1000년 역사적 고증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사진=사천시 제공)
사천문화원이 제20회 ‘시민의 날’과 ‘와룡문화제’에 즈음해 ‘사주 승격 1000년 역사적 고증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5월 1일 사천문화원 공연장에서 열린 이 학술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변동명 교수(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는 ‘고려 현종과 사수현·사주’를 주제로 현종과 사천의 관계를 조명했다. 특히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당시 사천의 지역사회와 유대 관계를 잘 맺으려 노력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그런 노력이 아들 순(순)의 현종 등극에도 영향을 줬다고 봤다.

한편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정수산 박사(서울대 정치학)는 고려사지리지와 고려사절요에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사주 승격’ 시점에 관해 고찰하며 고려사절요의 ‘현종 6년’(=1015년)이 더 정확할 것으로 추정했다. 여기 발제자와 토론자의 핵심 주장을 정리해 싣는다.

▲ 변동명 교수(전남대)
고려 현종과 사수현·사주 - 변동명(전남대 교수) -
사천은 경남의 서남부 지역에 자리한다. 육지를 중심으로 하는 시각에서 보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이를 만하나 해양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접근하면 바닷길의 요충지다.

고대 동아시아에서의 활발한 해상교류를 전하는 늑도 유적을 비롯하여, 통양창(通陽倉)과 같은 조창이라든지 고려말 조선초 왜구의 잦은 출몰 및 저들을 방어하기 위한 노산성이나 삼천포진 같은 수군 시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현종은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로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현종이 사천지역과 결코 얕지 않은 연고를 맺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유년기 현종과 사수현 지역사회의 유대
널리 알려진 대로, 현종은 안종 욱과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태조의 아들 왕욱과 경종의 후비 황보씨가 사통해 출산한 왕순이 후일 즉위하여 현종이 되었던 것이다.

헌정왕후 황보씨는 현종 출산 후 숨졌고, 사통의 당사자인 왕욱이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된 결과 그 소생인 현종도 2세 때부터 父의 유배지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됐다.

사수현으로 내려온 현종은 와룡산의 배방사에서 거주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종이 지었다고 전하는 시가 한 편 전하는데, 약초밭의 울 밑에 똬리를 튼 새끼뱀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그 뱀이 용으로 성장할 날이 오리라고 읊었다는 것이다.

현종이 친히 지었는가의 여부를 떠나, 유년기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이른바 ‘사아시’에는 주위의 그를 향한 어떤 바람과 같은 게 담겼던 것으로 판단된다. 왕욱은 물론이며 주위의 현지인들이, 아직 ‘사아’(새끼뱀)에 지나지 않은 현종이 후일 ‘성룡’하리라는 기대감을 품었으며, 그러한 분위기가 유년기 현종의 시작이라는 형식을 빌어 표출되었던 듯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러한 정서를 바탕으로 왕욱·왕순 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등, 양자의 사이에 연계의식 내지는 일종의 유대감과 같은 게 형성되어갔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연계 내지 유대관계는, 풍수지리와 사수현의 성황신앙을 통해서도 헤아릴 수 있겠다. 안종 욱은 사후에 사수현의 성황당 남쪽에 위치하는 귀룡동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밝은 그가 그곳을 명당으로 지목하였다는 의미일 터이다.

아울러 현종이 즉위한 다음의 일이겠지만, 왕욱의 그러한 선택을 배경으로 명당이 발복한 결과 마침내 현종이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으리라고 하는, 일종의 대중조작도 가능하였음직하다.

왕욱은 자신의 사후 어린 현종을 향한 지역사회의 기대가 약화되는 것을 우려해, 왕욱 자신이 귀룡동에 묻힘으로써 현종을 향한 지역사회의 기대와 관심이 자신의 사후에도 지속되기를 염원하였던 듯 여겨진다.


#유대관계 형성의 배경
현종대에 사천지역은 ‘풍패(豊沛)의 땅’이라 불렸던 것으로 전한다. 이 고장을 한(漢) 고조의 출신지인 패현과 같은 제왕의 고향으로 간주한 표기이다. 현종이나 그 父인 욱이 이 지역 출신이 아니었음은 이를 나위가 없다. 아마도 사수현이 현종의 고향이나 매한가지 의미를 지닌 고장이라는 정도의 표현일 터이다. 그만큼 저들과 사천지역 사이가 긴밀하였음을 과시하는 어법이 아닐 수 없다.

사천지역을 ‘풍패의 땅’이라 지칭하는 관행에는, 그러므로 지역민의 자부심은 물론이며 나아가 이제까지 살핀 거와 같은 안종·현종 부자와 지역사회 사이의 연대감 내지는 연계의식까지도 함축된 것으로 이해함이 온당할 줄 믿는다.

왕욱은 사수현에 유배된 죄인이었다. 그러함에도, 사수현 지역사회에서는 저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언효(彦孝)나 효질(孝質)과 같은 이가 대표적이었다. 그 배후에서는 또한 지역 유력계층의 영향력도 암암리에 작용하였다. 어찌 된 까닭일까.

당시 사수현은 王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죄인을 유배 보낼 장소로 지목된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는 일이다. 따라서 왕족이 사수현으로 유배되어 오는 거와 같은 사건은, 이 작은 지역사회에서 커다란 화젯거리로 떠올랐을 법하다.(그 외 성종의 후계 자리를 둘러싼 정치적 암투 배경은 생략)

게다가 왕욱 부자는 현 국왕의 자못 온정적인 보살핌을 받는 존재였다. 성종은 유배 길에 오르는 왕욱에게 ‘삼가고 초조해 하지 마시라’며 달랬던 것으로 전한다. 나아가 성종은 사수현에 궁장(宮莊)을 마련하여, 왕욱 일행이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보살폈던 것으로 전한다. 이는 곧 왕욱 부자가 여전히 국왕과 왕실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임을 지역사회에 널리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았을 법하다.

지역 유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연히 저들을 도와줌으로써 국왕을 위시한 중앙과 연결을 모색할 수가 있으리라는 판단에 이르렀을 법하다. 사수현 지역사회에서 왕욱·왕순 부자에게 도움을 주는 등, 양자의 사이에 연계의식 내지는 일종의 유대감과 같은 게 형성되어간 데에는 그와 같은 배경이 자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종의 즉위와 사주 승격
현종은 부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 2월에 귀경하였다. 성종 16년(997)으로서 그의 나이 겨우 6세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성종이 사망하였다. 6세의 어린 아이는 이제 의지할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1년 남짓한 사이에 견디기 힘든 시련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형국이었다. 12세에 즈음해 대량원군으로 책봉된 뒤 현종은 천추태후 측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가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된 까닭이었다. 그 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른바 목종 12년(1009)의 정변을 거쳐 그가 마침내 고려의 제8대 국왕으로 즉위하기에 이른다.

현종의 즉위는, 사수현 지역사회에서도 고대해온 바였다.

현종을 돕고 또한 그와 유대를 맺으려 든 배경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중앙과의 연결을 도모함으로써 변방에 위치하는 작은 고을로서 겪어온 오랜 소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사수현을 사주로 승격시켰다. 유년기 사수현에서의 생활을 되새기며 그 공로를 포상하는 차원에서 그처럼 배려하였을 터이다. 현종 2년(1011) 혹은 6년(1015)의 일이었다.

사수현을 사주로 바꾼 것은 명백히 승격의 의미를 담은 조치였다. 현종 9년(1018)의 대대적인 지방제도 정비 이후에도, 사주의 명호가 계속 사용되었던 게 그러한 증거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사천지역을 배려하는 차원의 조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제왕을 배출한 고을이라는 ‘풍패지지(豊沛之地)’로서의 자부심을 채우기에는 모자란 느낌이다.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현종의 즉위에 사천 지역사회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음을 지적해야 할 듯싶다.

이 고장 출신의 인물로서 현종의 즉위에 간여하였다든지 혹은 지역사회 차원에서 그에 도움을 준 흔적은 찾아지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 지역사회에서 현종을 돕는 등 그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그것대로 평가를 받아야 할 듯 여겨진다. 변방의 작은 고을에서 한때나마 중앙의 눈길을 받으며 ‘주’로 승격되었던 사실은 기념할 만하다. 중앙과 지방의 차별이 엄연했던 당시에, 변방에 위치하는 작은 고을이 지역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중앙에 그 존재를 각인시키기에 이른 점은 자부해도 지나치지 않다.

 

천년 사주(泗州)에 관한 몇 가지 고찰

고려사지리지와 고려사절요의 시간차 4년
어떤 기록을 믿을 것인가?…선택은 시민 몫


   
▲ 정수산 박사(서울대 정치학)
고려 현종 대에 이르러 사수현은 사주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고려사지리지와 고려사절요 두 기록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지리지가 현종 2년인 1011년에 사주로 개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고려사절요는 1015년 윤6월에 사주 승격을 기록하고 있어 그 시기를 놓고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먼저 고려사지리지 기록에서 몇 가지 미심쩍은 점을 살펴보자. 첫째, 1011년은 정초부터 거란의 침입으로 한 달 여 동안 몽진하고 그 뒤로도 전쟁 뒤처리로 어수선할 때인데, 사주 승격 조치를 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궁궐 보수나 전쟁 중의 논공행상에 관한 것만 있을 뿐 지방 관련 기록은 거의 없다. 둘째, 현종 3년 7월에 내린 교서에 ‘사수’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미 사주로 승격시키고 여전히 사수로 칭하고 교서에도 그대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셋째, 현종이 즉위한 이듬해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부친의 유배지였던 곳을 먼저 승격시키고 그 이듬해 당시 도움을 줬던 사람들을 포상했다는 순서도 조금 부자연스럽다. 그밖에 현종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지역인 합주(=합천)의 경우도 지방제도를 대폭 정비하던 해인 1018년에 승격되었다는 점에 비춰보더라도 1011년 사주 승격은 여전히 미심쩍다.

반면 고려사절요의 1015년 기록을 보면 사주 승격 관련 기록만 다른 문헌에서 확인이 안 될 뿐 그 전후의 기록이 다른 기록과 거의 일치해 있다. 사주 승격 부분도 특수한 달인 윤달에 승격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자체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다른 기록이 명칭만 바뀌었다는 사실만 알리는 기록임에 비해 승격이라는 조치에 의해 이름이 달라짐을 분명히 하고 있어 더 사실적이다.

그럼에도 고려사지리지 기록이 잘못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는 없다. 또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맞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결국 선택은 사천시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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