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愛 빠질 만한 이야기

▲ 왕욱이 통양포(선진리성)에 내려 사수(사천)를 돌아봤을 성황산성. 그 성황산성 위에서 내려다 본 사천읍 전경.

유로사태의 주범인 그리스는 극심한 재정적자 때문에 국가부도 앞에서 간당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라의 관광산업은 여전히 호황기입니다. 흔히 관광산업을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리스는 GDP의 20%가 관광수입이며 인구의 5분의 1이 관광업에 종사할 정도로 기반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가 이렇다 할 관광자원을 개발한 한 것도 없습니다. 지천에 널린 역사유물에 기대어 입장료를 받고 기념품을 팔며 숙박업을 하는 정도일 뿐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올해에만 1,8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 돈을 뿌리고 갔습니다. 그리스가 그렇게 노력한 바도 없는데 관광만으로 천문학적인 수입을 거둬들이는 원천은 무엇일까요? 아시겠지만 그리스 신화라는 스토리텔링의 효과입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가진 첫사랑의 정서는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국어 교과서에 나온 단편소설 하나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정서까지 침투하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니 따라서 관광객을 홀릴 만한 멋진 스토리텔링 하나만 있다면 그리스처럼 굴뚝 없이도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겠죠.

▲ 왕욱이 아들을 보기 위해 넘던 고자치.

자, 그럼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봅시다. 신분제도가 폐기된 지는 오래지만 그래도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따라서 왕자를 주인공 삼아 봅시다. 그냥 왕자면 그렇겠죠? 총명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성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자입니다. 여기에 출생의 비밀을 넣고 애끓는 부정 또는 모정을 살짝 가미하면서 로맨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금단의 사랑이라는 떡밥을 다시 투척합니다. 끝으로 마침내 왕위에 오르는 마무리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짜릿한 결말이겠죠. 그럼 시작해볼까요?

욱(郁)이 그녀를 만나려 한건 그저 연민이었다. 왕이던 조카가 죽자 왕비(王妃)인 그녀는 쫓겨나다시피 사가(私家)로 되돌아가야만 했고, 상처받았을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려 찾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욱(郁)과 그녀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싹텄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둘은 사랑의 결실인 순(詢)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순을 낳던 그녀가 그만 산고로 죽고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왕비(先王妃)가 산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왕이 욱을 귀양까지 보냈다. 자식마저 떼 놓은 채 배를 탄 욱은 12조창의 하나인 통양포(通陽浦)를 거쳐 사수(泗水)를 거슬러 오른 뒤 귀룡동(歸龍洞)에 정착했다.

일찍이 풍수에 밝았던 욱이 주변을 돌아보니 이곳은 천하의 대명지(大明地)가 아닌가. 이에 자신의 묘까지 봐두었으니, 하나뿐인 아들 순이 영화를 누리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도 그리던 아들 순이 인근 지역에 왔다는 것이었다. 두 살배기 순이 아비를 그리워하자 왕이 그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유배생활을 하는 아비와 함께 동거하게 할 수는 없어 재 너머 마을에 머물게 되었고, 이에 욱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개를 넘어 아들을 보러 갔다. 그러나 왕성에서 호의호식하던 욱에게 귀양살이와 매일 벌어진 원행길은 고될 수밖에 없었으니, 병을 얻고 쓰러지면서 유언을 이렇게 남겼다.

▲ 이구산 자락 아래 능화숲.

사랑하는 아들 순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역수(逆水)가 흐르는 이곳에 시신을 엎어서 묻으라고(伏屍反復). 이에 순은 아비 욱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꽃밭등에 엎어서 묻은 후 왕성으로 향했고, 13년 후 천추태후의 모략을 물리치고 마침내 왕이 되었다.

위는 고려 제8대 현종원문대왕에 대한 고려사 기록입니다. 현종(顯宗) 즉, 왕순(王詢)은 안종 왕욱(王郁)과 경종의 부인인 헌정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종의 근친혼으로 폐륜이라 할 수 있지만, 이는 왕가 혈통보존책으로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마찬가지였죠. 현종은 왕성에서 두 해를 살다가 정동면 장산리에서 4년간 머물렀고, 그의 아비 왕욱은 사남면 우천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왕욱은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11킬로미터를 매일 오갔다고 합니다. 되돌아오는 마음이 힘겨워 머리를 돌리고 또 돌렸다고 하는데요, 그 마음이 담긴 고개라고 해서 고자치(顧子峙)라고 불렀습니다. 현종이 아비를 묻었다는 꽃밭등은 이름 그대로 능화(陵花)인데요, 지금의 사남면 능화마을입니다.

고자치는 능화마을에서 학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고, 정상에서 능화마을 쪽으로 50미터 정도에 왕욱의 묘의 흔적이 있습니다. 현재 능화마을을 지나는 죽천강은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르는 역수(逆水)인데요, 역수에 깃든 왕의 전설은 정말 어지간한 대하드라마 정도는 찜 쪄 먹을 정도로 스펙터클합니다.

‘토지’의 박경리 선생은 하동 평사리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죠. 이 때문에 집필지인 원주와 하동이 원조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동의 최참판댁을 먼저 떠올립니다. 또한 올레길, 둘레길과 더불어 인기를 모으는 토지길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가 가진 힘입니다.

인기TV프로그램 ‘1박2일’에서 사천이 소개됐을 때 창선-삼천포 대교와 유적지 몇 군데를 보여주는 정도로 그치는 걸 보고 참 안타까웠습니다. 역사 스토리텔링이 구축돼 있었다면 인기 연예인들이 왕의 전설을 따라 릴레이를 하는 과정을 보면서 더 많은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몇 해 전부터 캠핑 붐이 일면서 주말마다 많은 사람들이 능화숲을 찾는데요, 캠퍼들의 되돌아가는 걸음에 이야기를 한 가닥씩 안겨준다면 전설의 씨앗이 널리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능화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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