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 영화 "베를린" 리뷰

  

▲ 을씨년스런 베를린의 날씨와 영화의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스파이들의 삶이란 얼마나 진부한가? 그들의 삶은 늘 시궁창처럼 냄새나고 어둡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왜 그런 비루한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세력들인데 스파이들의 삶과 행동의 가치는 그들, 즉 조종하는 세력들의 운명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지역에 살면서 단지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에게 적대적인 나라, 종교적 차이도 아니고 누대에 걸친 핏줄의 정통성 문제도 아닌, 단지 한 때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러나 지금은 몹시 궁색해진, 아니 어쩌면 그 motto조차 흐려진 어떤 이념 때문에 이 만큼 오래 서로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동시에 지배세력들이 철저히 서로를 이용하는 나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할지도 모른다.

그런 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이제야 등장했다는 것도 굉장한 난센스다. 이유야 잘 알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문제는 금기시 되었고 더군다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영화 제작사들의 입장에서 엄청난 위험요인을 떠안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즉 반대편에 객관적인 입장 표명조차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었고 지금도 이 부분은 대체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이념적 편견을 걱정할 만한 주제를 약간은 우회하여, 이념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속에 있는 사실적 인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은 류승완 감독의 역량이라고 보인다.

혼돈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국제 조직, 그리고 뭔가 정리되지 않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도입부는 이런 첩보영화의 분위기를 돋우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007영화의 도입부나 최근의 “본” 시리즈의 도입부도 빨리 감 잡을 수 없는 분위기를 보여 줌으로서 감독은 관객의 몰입을 요구한다.

▲ 알듯 모를듯 표정으로 스파이의 삶에 염증을 느끼는 련정희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표종성(하정우 분)과 그의 아내 련정희(전지현 분)에게 닥쳐오는 엄청난 시련을 이념과 음모, 배신, 미묘한 인간관계 그리고 희미한 사랑으로 제법 잘 버무린 120분이었다. 사실 120분의 거의 절반은 치고 때리고 부수는 장면이었고 또 사건의 설명과 전개에 대한 설명을 하는 탓에 정작 표종성과 련정희 부부가 왜 그렇게 되었으며 또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는 관계로 관객들은 몇 가지 영화적 장면이나 대사로 그 모두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감독의 의도인지 아니면 시간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을 준다.

비슷한 종류의 영화 “쉬리”로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한석규(정진수 역)의 영화적 역할에도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있다. 한석규의 무게감이 영화의 중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하였지만 그의 영화 내부에서의 역할은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다. 왜 그가 “좌익”을 그토록 싫어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배경 설명이 없다. 단지 국가정보기관에 근무하기 때문에 그런 성향일 것이라는 추측은 영화적 공간을 헐겁게 만들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데로라면 그는 비합리적 보수인 동시에 생각 없는 극우성향의 인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영화 후반부에는 돌연 목숨을 걸고(영화 속에서 표종성조차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공산주의자 표종성을 도와준다. 설득력이 전혀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감독이 영화적 수사로 이 부분을 전혀 설득하려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봐 달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관객에게 이념 이전에 인간적인 것을 보라는 감독의 무언의 권고인지 대단히 모호하다.

북한, 그리고 왜곡

실제로 북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외교관을 이용한 외화벌이를 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지도자의 개인적 자산 때문에 국제적으로 이런 경로를 거치고 이런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물론 영화적 모티브로 충분하고 개연성이 다분한 일이기는 하지만 북한이라는 것과 이 모든 비인간적, 비논리적 음모를 등치시키는 것은 왠지 구시대적 발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영화가 제작되는 것은, 한 때 반공을 국시로 했고 지금도 특정부분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만약 영화의 내용이 그런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진행되었다면 아마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이 영화에 눈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것을 영화적 동기로 삼기는 했지만 영화 내부적인 이야기의 핵심은 체제로부터, 이념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한 쌍의 남녀, 그들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 그것으로부터 이어지는 땀 냄새 나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에 더 가깝다. 그나마 이 영화가 가치를 가지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 스파이의 삶, 그 전형을 보여주는 표종성

액션

실제로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가는 피아노 선, 흔히 말하는 와이어 액션과 배우들의 혼신의 노력으로 할리우드 영화 이상의 액션장면을 연출해내고 있다. 특히 주인공인 하정우가 보여주는 지붕 추락신은 이 영화의 액션장면 중 백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상당한 위험이 있는 액션 장면을 추가해야할 만한 극전개의 타당성은 안타깝게도 발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내 련정희가 잡혀가는 차량을 따라가며 보여주는 위험천만한 표종성의 추격신이나 마지막 동명수(류승범)와 표종성의 지나치게 길게 묘사된 격투신은 모두가 극 전개와는 조금 차이가 나는, 다소 냉정하게 표현하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액션 장면으로 보인다. 이런 난이도만 높고 극 전개와 유리된 액션 장면 보다는 영화적 전개와 극의 흐름이 녹아들어간 액션 장면이 있었더라면 이 영화의 영화적 가치는 좀 더 상승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