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베토벤 교향곡 제 9 번 합창 감상

 

▲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 존 엘리오트 가디너 지휘

아직도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은 12월 19일의 충격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여 밥 먹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고 토로한다. 심각하다. 하지만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위로할 방법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왜 이토록 오래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유지되는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제 모든 것을 털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밝은 지도 벌써 10여 일이 다 되어 가는 이때, 이 음악이 약간은 엉뚱하기는 하지만(대체로 연말에 듣는 음악으로 알고 있다.) 그 음률의 무한한 힘과 마지막 부분 합창으로 울려 퍼지는 쉴러의 환희의 송가를 음미하면서 어둡고 무거운 패배의식을 떨치고 다시 빛나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

 

침묵의 영혼을 깨우며.

제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쾌활하고 빠르게 그러나 조금씩 장엄하게)

d단조 2/4

 

오보, 플루트, 클라리넷, 파곳(버수운), 팀파니가 조용한 서주부를 시작한다. 어둡고 무거운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의 상처받은 영혼에 천국의 음성을 들려주는 듯 조용하면서 부드럽게 시작된다. 이어서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들이 1주제를 시작하고 평화롭게 이어간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격정의 순간, 마치 삶에 무수한 변화의 꼭짓점 마다 겪게 되는 격정처럼 현악과 관악의 어우러져 빠르게 연주된다.

 

그리고 다시 모든 악기가 합세하여 장대한 주제를 연주한다. 금관악기에서 느껴지는 것이 격정과 강인함이라면 목관악기에서 느끼는 것은 온화함이며 애절함이다. 이어지는 목관악기의 연주가 이 음악이 결코 격정만을 담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베토벤의 음악 중 당시 결코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 그의 ‘대 푸가’인데 아마도 고전음악의 정형성을 탈피한 ‘대 푸가’의 불협화음 혹은 전위적 성향은 세기를 앞선 천재의 위대함이었을 터, 이러한 베토벤은 전위적인 성향이 1악장의 여기저기 구부러진 골목마다 언뜻 언뜻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의 신분사회에서 마치 모차르트처럼 귀족의 하수인으로 적응시키려던 베토벤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 당당해지려는 태도는 음악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많은 걸작들 속에 전위적 성향의 음악적 특징들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를 악성이라고 부르는 이유 중에 이러한 부분도 분명 있으리라.

 

완전한 악장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물이 흐르듯 악장을 이어가는 것이 낭만파 이후의 음악이라면 베토벤이 활동하던 그 시절은 엄격한 악장의 구분이 있던 시절이어서 베토벤은 1악장의 코다(악장의 마지막 부분을 위한 특별한 편성)를 도입하여 악장의 마무리를 준비하는데 서주부의 주제를 반복하는 느낌을 얼핏 주면서도 이내 힘차고 장대한 마무리로 1악장을 끝낸다.

 

음과 음 사이의 고요.

제2악장 Scherzo Molto vivace d단조 3/4

 

 

지나치게 소란스럽다가도 이내 정돈되는,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 악장은 처음부터 빠르고 힘차다. 폭풍이 휘몰아치듯 팀파니 소리가 그치지 않고 관악기들은 들뜬 분위기 속에서 단조의 위계를 비웃듯이 A와 G코드를 넘나들며 때론 밝았다가 때론 어두워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당시에 잘 연주되지 않았던 튜바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한 알토 트럼본 등의 리듬 관악기들의 소리가 전체적인 악장의 분위기를 더욱 굵고 강하게 만든다.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튜바로 편성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내면의 풍경을 담아내는 음과 음 사이의 공간, 이를테면 슬러나 스타카토를 적절히 조절함으로서 시끄러운 가운데 깊은 고요가 있고, 또 고요함 가운데 격정이 반복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첼로의 저음과 팀파니의 저음 그리고 알토 트럼본의 저음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파괴적이고 비이성적이며 그리고 음험한 마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2악장은 이렇게 끝은 내고 이 음악의 중심부인 3, 4악장으로 넘어간다. 2악장은 1악장의 주제가 3, 4악장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데, 가끔씩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단속적인 연주는 베토벤의 삶에 사선으로 길게 걸쳐졌던 불행으로부터 빚어지는 인간적 고뇌, 혹은 19세기 유럽을 감싼 변혁의 공기 속에 살면서 이리 저리 떠도는 인간 군상들의 움직임들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느리게 , 그리하여 내려앉는 우리의 마음들.

제3악장 Adagio molto e cantabile Bb장조 4/4

 

칼렌 버그 숲을 이리저리 걸으며 이미 귀머거리가 된 베토벤에게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는 이미 소리가 아니었다.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는 아마도 내면의 소리였을 것이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열정적인 내면의 소리가 오선지에 옮겨지는 순간, 그것은 빛나는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은 베토벤을 넘어 우리의 것이 되고 또 모두의 것이 된다.

 

이미 그는 신병과 실연으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내가 죽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음악적 작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그 뒤 그는 자신의 삶에 더 빛나는 열정을 가졌을 것이고 그 결과 로망 롤랑이 말하는 걸작의 숲을 지나 마침내 이 음악을 작곡했을 것이다. 평화로운 숲을 거닐며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3악장은 고전파로 분류될 수 있는 음악을 느낄 수 있는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헨델, 혹은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밝은 느낌의 정형적 변주곡 풍을 베토벤은 스스로 거부했지만, 그도 그 시대 사람이므로 형식의 틀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간부분에 들어있는 춤곡형태는 19세기 유럽의 문화, 특히 궁정의 귀족문화를 조금은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고전파 음악가들이 귀족에게 예속되어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그러한 것을 수긍한 것과는 달리 평생 귀족으로부터 당당하게 독립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런 행동과 태도를 견지했다.

 

3악장의 음악과 베토벤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베토벤이 생각했던 영혼의 해방은, 신의 피조물인 불완전하고 죄지은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내려지는 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적 해방이 아니라 순수한 영혼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결과이자 좀 더 나아가 능동적 해방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프랑스 대혁명을 열렬히 지지했음과 그 중심인물이었던 나폴레옹과 “영웅”교향곡 이야기가 이러한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사람들에겐 위험한 생각이며 절대자에 대한 도전이자 심지어는 신성모독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동시에 그분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천국에 가기를 간구했던 나약한 인간적 면모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베토벤의 내면을 보여주려는 듯 3악장의 현악기들은 악장 내내 평균율을 유지한다. 1, 2악장의 극심한 변화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고요한 숲의 바람처럼 유려하고 부드러우며 정겹기까지 하다. 이에 관악기들도 주제를 변주함으로서 장차 다가올 위대한 4악장에서의 신에게 의지하지만 동시에 신성에 다가가는 인간의 영혼, 그 위대한 영혼과 신성을 동시에 노래하는 ‘환희의 송가’를 준비하는 듯하다.

 

 

쉴러의 목소리

제4악장 Presto-Allegro assai-

Andante maestoso-

Allegro energico, sempre ben marcato

 

4악장의 전체적 느낌은 5번 교향곡이나 3번 교향곡에서 느꼈던 웅장함, 에그몬트 서곡이나 코리올란 서곡에서 보았던 장중함, 거기에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러시아적 정서인 광막함, 그리고 멘델스존의 남유럽풍의 화려하고 유려함, 거기에다 브람스가 가지는 난해한 낭만적 느낌을 4악장에서 우리는 모두 느낄 수 있다.

 

시대의 혁명적 변화를 느낀 베토벤은 그의 음악을 통해서 그 나름대로의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다. 즉 사람의 목소리를 넣은 교향곡을 작곡함으로서 지금까지의 교향곡으로부터 확연히 구분되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에 있어왔던 오라트리오적 요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오라트리오는 악극, 이를테면 성서의 일부 내용을 들려주며 일관된 스토리보드에 따른 음악으로서 움직임 없는 오페라이므로 스토리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교향곡 내부에 합창은 교향곡 전체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동시에 그 곡에 녹아들어 전체 교향곡과 같이 호흡하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멜로디의 강렬한 느낌을 배가시키는 장치로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빛나는 음악적 표현의 방법이었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나타내려한 신과 인간의 소통을 베토벤은 몇 소절의 주제로 표현한다. 첫 부분 강렬한 주제의 표현은 이제 이 음악적 완성이 보여 줄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알려주는 듯하다. 현악기들이 일제히 저음으로 미끄러지는데 관악기들은 고음에서 이 상황을 받아내는 것이 이어지다, 너무나도 유명한 4악장의 주제부분의 멜로디가 저음의 현악에서 시작하여 중음의 현악기로 다시 높은 바이올린의 합주로 다시 관악기와 타악기와 현악기의 합주로 이어진다. 이는 가히 우리의 음악적 감각을 지배하고 남음이 있다. 거기서 베토벤은 신의 음성을 이야기 하려 했는지 모른다.

 

마침내 등장하는 인간의 목소리, 처음 테너 독창으로 '오! 벗들이여 이 가락이 아니고 더욱 즐거운 가락 그리고 환희에 넘친 가락을 함께 부르자!'라고 노래한다. 뒤이어 중창으로 이어지다가 그 뒤 폭풍처럼 합창이 뒤따른다. 합창의 전체적인 형식은 푸가형식이 중심축을 이루고 각각의 성부들이 거기에 장식처럼 놓여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음악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음악이 마치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내가 연주하고 느끼는 것처럼, 그리하여 음악이 기계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 촉각으로 파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피부의 모든 솜털이 일어서는 놀라운 느낌을 한 동안 느낄 수 있다. 프레스토에서 보듯이 이 악장은 모든 것이 빠르다. 어쩌면 프레스티시모였는지도 모른다.

 

환희의 송가에서 쉴러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분열된 가혹한 현실을

신비로운 힘이 재결합시키고

인자한 날개 아래서

모든 인류는 형제

 

힘내라 벗들이여! 다시 일어나 현실을 뚫고 마침내 승리하는 날까지 당당하게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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