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의 역사와 인물- 첫 글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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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역사와 인물- 첫 글을 열며
  • 박동선 사천문화원장
  • 승인 2009.03.11 12: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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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천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바다와 대륙과 하늘이 잇닿은 곳이 사천이다. 공항이 있고 항구가 있으며, 고속도로가 지나가니 사천은 하늘이 낳은 교통의 요충지라 할만하다.

사천에서는 풍부한 농수산물이 난다. 야산에서 자란 사천 단감은 국내에서 제일가는 단맛을 간직하고 있다. 어산물은 이 보다 더한 것이 많다. 사천 앞바다 죽방렴에서 생산되는 멸치는 그 값이 비싼 편이면서도 없어서 못살 지경이다. 사천에서 말린 쥐치포는 호사가들의 입맛을 북돋운다. 사천산 전어는 그 기름진 맛이 남해안에서도 평판이 자자하다.

박동선 사천문화원장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지난 2003년 11월 말, 대전 지방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해 몰려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 싱싱한 사천만 바닷고기의 회 맛을 이 곳 사람들은 오히려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머나먼 남쪽 변방에서 엄혹한 세월 보내야 했던 사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은 오랜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 외진 곳으로 치부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직하면 ‘진주라 천리 길’이라 했겠는가. 사천은 진주보다 더 남쪽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으니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정치와 경제권에서 머나먼 소외지역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지난 시기는 너무나 암담한 세월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 엄혹한 세월은 고려와 조선을 거처 오늘날까지 천 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중앙에서 결정된 행정사항이 사천에 도착하기 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려야 했고, 사천지역에서 필요한 요구사항이 조정에 건의되기까지는 또 다시 한 달 여가 소요됐으니 그것이 공동사회를 이루고 사는 세상에서 할 짓이었겠는가. 치안이 부재 상태였을 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다. 왜구들의 노략질은 반 방치상태에 있었고, 게다가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너무나 엄혹해서 평민들의 고달픈 생활 습속은 아무리 세월이 가도 달라질 기미가 없이 천여 년 세월을 그대로 이어왔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고려 말 사천지방에 주석하고 있던 달궁이라는 스님이 지역민 4천여 명을 모아 놓고 국태민안을 비는 매향의식을 했겠는가. 향을 땅에 묻으면서 부처님의 자비가 온 누리에 비쳐지기를 염원하는 의식이 매향의식인데 그렇게라도 해서 백성들의 안녕을 도모해야 했으니 이 지역 주민의 처참한 삶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눈에 선한 것이다.

하층민의 고단한 삶과 풍자 담아낸 가산오광대

조선시대라고 해서 달라진 것도 없었다. 조선 조정은 백성들로부터 세미를 거둬가기만 했을 뿐 지역민에게 베푼 것이라고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사・농・공・상으로 구성된 조선사회에서 해안 지방인 사천에서 상류계급인 사류가 탄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대로 세 물림한 아전들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주구에 불과했다.

사천지역에는 지리산으로 둘러싸인 내륙지방에서 거둔 세미를 모아두는 조창들이 있었다. 이는 멀리 신라시대부터 시행된 해운을 이용하기 위한 물류기지였다. 이 조창을 중심으로 장마당이 섰고 모여든 사람들은 서민 생활에 윤기를 불어넣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유행한 것이 광대놀음 가산오광대였다. 광대놀음은 천민들이 양반계급을 빗대어 삶의 허무를 그려낸 마당극인데, 양반 자신들도 이 광대극을 보고 웃으며 즐겼다.

역사상 사천지역에 유일하게 정부의 구휼기관이 들어선 것이 영조시대의 제민창이었다. 1762년 영・호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좌의정 홍봉한이 주창하여 충청도 비인과 전라도 순천, 그리고 경상도 사천에 제민창을 설치해 2만석의 양곡을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거둬갔다. 나중에 환곡으로 빚어진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불러들여 조・일 연합 진압군을 조직한 조정은 지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여기서 죽은 농민군 위령탑이 사천과 이웃한 하동군 옥종면 어느 산정에 세워져 있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일어선 조선조정은 망해 나갈 때까지 변화의 바람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위정척사란 명분을 내세워 외세를 배척하다가 종내는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해방이 되어 나라를 세우기는 했으나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전쟁도 겪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새천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서양문물에 잠식당한 우리 삶 우리 전통문화

이른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은 이미 서양문물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전기로 밥을 해먹고, 기름으로 난방을 하며, 양장 차림으로 길나들이를 한다. 커피를 마시고, 멀리 있는 벗들과 전화를 한다.

인륜대사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결혼식인데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결혼풍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우후죽순처럼 도심가운데 들어선 결혼식장에서는 국적불명의 혼례식이 진행되고 있다. 결혼식장은 축의금 전달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평생을 약속하는 결혼식을 10여분 만에 얼렁 뚝딱 해 치우고 만다. 하객들의 표정 어느 구석에도 백년가약을 맺는 신혼부부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장례식도 다를 것이 없다. 마지막 가는 사람에 대한 예를 치르기에 장례식장 분위기는 너무나 허술하고 경박하다. 장례식장에서 경건한 분위기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죽음에 대한 애도의 마음도 없다. 조상에 대한 흠모의 정도, 부모를 향한 효심도 죽음 자체로서 끝나고 만다. 이틀 밤을 새우고 나면 주검은 한줌의 재가 되어 납공당으로 운송되고 만다.

전래의 결혼식은 지역축제 마당에서나 간혹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장례식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주검을 저세상으로 나르던 상여 행렬은 민속축제에 출품된다. 무형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유지되거나 재현되고 있는 것이 전통혼례식이고 전통장례식이다.

우리 말과 글, 고유문화가 있었기에 혼란과 좌절 극복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생각은 하염없고 걱정은 끝이 없으나 대책 또한 세우기 어려우니 한심할 따름이다.

바이블을 쓴 유태민족은 세계사에 영향을 끼칠만한 종교를 넷이나 창시하였다.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공상주의가 그것이다. 우리는 왜 다른 민족이 만든 종교를 끌어다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잠식시키고 말았을까. 머리가 모자라기 때문인가. 생활환경이 부족해서 인가.

일인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해외에다 내 건 침략명분이 조선족은 자조할 줄 모르고, 단결하지 못하며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힘센 민족이 밀어붙이니 그런 줄만 알았다. 셋만 모여도 의견이 각각이니 단결심이 약하였다. 결집할 건덕지가 없으니 노름으로, 술추렴으로 세월을 허송한 것이 지난시기였다.

그런데 한 번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는 일인들의 주장이 헛된 모함이었음을 증명하였다. 한번 마음을 가다듬은 지 3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단결 잘하고, 가장 부지런하며 자립 자족할 수 있는 국민임을 세계만방에 확인시켰다. 우리의 머리가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민족임을 증명하였다.

혼란과 좌절 속에서도 반만년 세월을 용케 이어 온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문화는 전통과 창조를 병행해 나가야 한다. 옛 것을 도외시하거나 잊어버리면 문화의 접변동화로 이어지고 만다.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이 문화다. 옛 것만 답습해서는 오늘에 사는 자신의 존재자체가 사리지고 만다. 문화는 끊임없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해양문화 내륙문화 어우러진 사천, 새로운 문화 창조해야

해양문화와 내륙문화가 어우러진 곳이 사천이다. 바닷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거칠고 외향적이라면 내향적이고 의지적인 것이 내지인의 소양이다. 이들이 한데 아울러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사천지역 문화다.

사천에도 선사문화가 존재한다. 패총이 있고, 고인돌이 있다. 이들을 고이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사천에도 선비문화가 존재한다. 서원이 있고, 향교가 있고,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있다. 굴곡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엄연한 사천의 문화적 자산이다. 지난 인물을 현창하고, 지난 역사를 보존하는 것은 오늘의 문화인이 해야 할 일이다.

바야흐로 사천 지역은 경제적으로 도약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사천을 대표할 만한 기업이 항공우주산업이다. 하늘을 나는 산업이 사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바다를 가르는 해양산업도 만만치 않다. 사천문화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우선해서 이뤄져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사천 시민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어른을 존경하고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사천문화원이 그 중심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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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사람 2012-03-24 04:52:04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못하다. 공부자는 知行하지 못하면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고 하였다. 사천의 문화를 바르게 세워야 할 임무를 누구보다 절감하고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왜 말은 번지르하게 하면서 그렇게 못하는가? 문화원장이라는 감투만 가지고 있는 게 문화원장의 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여러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글에는 책임이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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