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동유럽여행기3. 화려한 건축,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아침, 저녁은 의외로 시원했지만 한낮에는 여름을 느끼게 했다. 비엔나는 두 개의 큰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도시전체를 그리는 큰 원(링)을 중심으로 링 밖 그리고 링 안으로 구분 짓는다. 대부분의 문화유적은 링안에 있지만 링밖에도 제법 많은 문화유적이 있는 도시다. 큰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그들의 유적은 온전하게 보전되었고 그 덕에 자손들은 관광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이지만 오래된 건물이래야 겨우 몇 백 년, 그나마도 다 허물어져가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이고 조금 오래된 석조로 된 것이래야 겨우 탑이나 다리 정도인 우리나라 문화유적에 비하면 이들의 문화유산은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어마어마한 정원의 쉔브룬 궁전

▲ 비오는 날 아침 쉔브룬 궁전

쉔브룬 궁전을 찾아가는 날 아침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큰 비는 아니었지만 관광을 방해할 정도의 비인지라 미리 준비해 간 비옷을 배낭에 넣고 트램을 탔다. 궁전 가까이 내려서 처음 본 쉔브룬의 느낌은 화려한 미색의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한 때 박정희 대통령의 고매한 문화적 식견에 따라 이 나라 문화재들과 그 주변을 모두 동일한 색으로 칠했던 그 급조된 미색과는 사뭇 다른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나온 깊이를 가진 미색이 이국의 여행자에게 또 다른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마 비 오는 날이어서 색채감이 더 살아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 사진 촬영이 금지된 궁궐내부를 몰래 찍다.

   
▲ 역시나 촬영이 금지된 중앙 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고 궁궐 앞 광장은 두 개의 물오르지 않는 분수만 빗물을 담아내고 있었다. 우리의 건축과 비교할 수도 또 비교해서도 안 되는 서양정원의 특징은 완벽한 비례와 균형이다. 자연 그대로 둔 것은 거의 없고 모든 것이 사람 손을 거친 것이어서 자연 그대로 두고 보는 동양적 문화 환경에 익숙한 필자는 가끔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다.

 

▲ 이 궁궐의 영욕을 기억하는 씨씨(엘리자벳)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쉔브룬 궁전은 1612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발견한 아름다운(Schoen) 샘(Brunn)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흔히들 쉔브룬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의 축소판으로 설명되곤 한다. 이것은 프랑스와의 알력이 한창일 때 오스트리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크게 증축하고자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과 유럽을 휩쓴 전염병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점점 악화되자 규모를 줄여 지금의 크기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방 개수는 무려 1441개나 된다. 결코 작지 않은 규모임을 알 수 있다.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프란츠요셉 황제, 엘리자베스 황비(애칭 sisi) 등이 이곳에서 생활한 이 로코코 양식의 우아한 궁전은 오스트리아사람들에게는 화려한 왕국의 영광을 간직한 장소인 셈이다.

 

▲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궐 뒷편 정원

이 궁궐의 가장 큰 특징은 뒤편의 광활한 정원에 있다. 정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규모가 커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베르사이유의 정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넓은 정원은 동양의 오목조목함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그저 현기증 나는 현실일 뿐이었다. 심어 놓은 꽃들의 색깔과 문양 그리고 그 조형성은 건물에서 보이는 조형성 그대로인데 어쩌면 이러한 조형성은 이 나라 혹은 서양인들의 머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태도일 것이다. 즉, 건물 외벽을 동일한 패턴으로 장식하는 것과 건물의 난간마다 올라가 있는 신상이나 동물조각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궁궐의 비례와 대칭은 단순한 조형미를 넘어 그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생활의 태도까지도 담겨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 정원 끝 부분에서 본 궁궐의 뒷모습

정원이 끝나는 부분에 당연히 거대한 분수가 있고 그 분수는 역시 당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 중 일부를 차용한 분수이고 보면 조형적 특징은 화려하고 매우 다양하나 그 안에 존재하는 정신적 혹은 문화적 사고는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는 스스로 동양문화나 정신에 대한 자부심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려는 나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들의 문화적 배경은 보이는 것의 화려함에 비해 단순하다는 것이다. 분수에는 물의 신 포세이돈이 당연히 등장한다. 그 주위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과 여러 동물들 그리고 여신들이 거의 알몸으로 등장한다.

 

▲ 글로리테 앞 분수

프러시아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서 세운 영광의 문 글로리테는 쉔브룬 궁전의 제일 끝 꼭대기에 있다. 그러니까 궁전으로부터 거의 2km를 걸어 올라가서 만날 수 있는 문이다. 지금은 내부를 개조하여 카페로 사용되고 있으니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알았으면 아마도 화를 낼 일일 수도 있겠지만 문화재를 이용하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태도나 자세는 그리 나무랄만한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 글로리테 측면

성 스테판 성당

기독교의 영역인 서양에서 기독교의 성전을 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규모가 크고 오래된 기독교의 성전은 우리에게 단순한 건물이나 성전 이상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비엔나에서도 시내의 가장 번화한 게른트너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성 스테판 성당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700년전 보헤미아의 왕인' 오토 2 세(Otto II)'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6 세(Rudolf VI)'에 의해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한 이래 그 뒤 300여 년에 걸쳐 완공되었다고 한다.

 

▲ 거대한 스테판 성당. 카메라 앵글(17mm)에 잡히지 않을 만큼 크다.

'성 스테판(St' Stephen)'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부제이자 순교자이다. 가톨릭에서 부제란 성직자의 3가지 직위 가운데 주교와 사제에 이은 직위를 말한다. 스테파노와 스테판은 같은 말이다. 비엔나 중심의 광장은 '스테판광장(Stephansplatz)'이고 그 광장의 중심에는 고색창연한 고딕식 '성 스테판성당(St. Stephens Cathedral)'이 자리 잡고 있다.

 

▲ 성당내부
▲ 첨탑을 지지하는 거대한 기둥들

고색창연한 건물의 외벽을 보고 있자니 지난 700년의 세월이 보이는 듯 했다. 내부는 헝가리의 교회들이 가진 화려함은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고딕 건축의 전형적 높은 지붕과 검고 장중한 벽체 기둥들이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신으로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높이 더 높이 지붕을 뽑아 올렸기 때문에 내부의 공간은 그 무게를 견뎌내기 위한 기둥들이 다른 건축양식보다 상대적으로 많고 창문을 넓게 내기 어려운 구조이어서 어두웠지만 오히려 그 어둠은 신비로움을 주기도 한다.

▲ 성당 외벽

외벽의 화려한 조각들은 건물의 나이에 따라 검게 변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건물 전체를 나타내는 징표처럼 보였다. 이 성당을 건설한 사람들의 후예들은 본래는 걸어서 오르도록 만들어진 교회 첨탑까지의 계단 대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놓고 관광수입을 짭짤하게 올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첨탑 끝에 올랐더니 비엔나 시내가 훤히 보였다. 관광자원의 개발은 교회도 예외가 아님을 그들이 엘리베이터 요금으로 받는 5유로의 돈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 첨탐에서 둘러 본 비엔나 시가

 호프스부르크 궁과 미술사 박물관

   

▲ 호프스부르크 궁

   
▲ 미술사 박물관 내부

아내의 여행일정표에 따라 다음 날 우리는 스테판 성당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미술사 박물관과 호프스부르크 궁을 보기로 했다. 미술사 박물관은 순전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유물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건물 입구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수리 중이라 촬영할 수 는 없었다. 미술사 박물관에는 대부분은 모작이었지만 정말 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서양 회화, 특히 중세 르네상스 회화를 거쳐 바로크와 로코코 그리고 18세기와 고전주의 낭만주의를 망라하는 회화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다리가 아파 곳곳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쉬며 보아도 족히 반나절은 걸리는 방대한 그림들을 보며 그들의 문화에 대한 태도와 이해, 그리고 그것의 유지 보존에 대해 부러움과 동시에 변변한 미술사 박물관 하나 가지지 못한 우리의 처지에 약간의 위축감을 느꼈다.

▲ 국회의사당 정면

  미술사 박물관을 나오는 길에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았다.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아테네(지혜의 여신)를 전면에 세워놓고 있었는데 그 의미는 좋아보였다. 현대 간접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표자가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우리나라 국회에 있는 자들을 생각해보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며 지혜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시정잡배의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나라도 그런 의미에서 아테네를 세워 놓았을까하는 의문이 슬며시 들기도 했다.

 

밸베데레 궁과 클림트

▲ 벨베데레 궁

링 밖에 있는 벨베데레 궁은 빈의 유력자 오이겐 폰 사보이 공이 여름 별궁으로 사용하던 궁전이다.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의 거장 힐데브란트가 설계했다. 상 하궁으로 되어있고 그 사이를 프랑스식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오스트리아까지 오면서 수 없이 봐왔던 건축물이라 이제는 너무 익숙해졌고 간혹 외벽의 화려한 장식이 식상하기도 한데 이 궁궐 역시 화려한 외관을 갖춘 궁궐이고 보니 그 건물이 그 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 궁궐 앞 석상

이 궁에 온 목적은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궁궐에 온 사람들도 클림트를 보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그림 “키스”가 전시된 방에는 그의 명작을 보기 위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미술의 문외한인 나의 감각으로 보아 그 그림이 그렇게 명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러 설명서에 읽은 것처럼 황홀한 남녀의 키스라고 보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비뚤어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모든 이들이 명작이라고 일컫는 그림을 나 혼자서 그것도 완전히 문외한인 내가 별로라고 이야기 해본들 누가 동의하겠는가!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동양에서 온 여행자의 눈에만 이 나라, 아니 서양의 모든 건물이 비슷비슷하게 보였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양에서 태어나고 서양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의 눈에도 이 비슷비슷함은 견디기 힘든 권태로움을 주었던 모양이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가 바로 그 사람이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삭막하고 특징이나 국적 없는 현대주택을 지양하고,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건축물을 목표로 하여 과거 왕이 살던 위엄 있는 왕궁과 같은 대중의 집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생태적인 것을 강조한 외벽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고 특히 강렬한 색채와 서로 다른 모양의 창틀, 둥근 탑, 곡선으로 이루어진 복도 등이 조화를 이루어 지금까지 보아 왔던 현대 서양식 건물의 지루함을 한꺼번에 날리는 건축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지나친 인공적 작업을 거쳐 표현된 것이라 이 또한 서양식 건축의 변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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