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욱의 유배와 헌정왕후의 사망이 갖는 의문점

성종 즉위 10년이 되던 해, 역사는 희대의 난륜을 기록하고 있다. 왕후이자 청상이 된 조카를 숙부인 종친이 임신을 시켜 발각된다. 이에 성종은 그 정부(情夫)인 왕욱을 황궁에서 삼천리길 사수현 귀룡으로 유배형으로 일단락시킨다. 그러나 유배를 떠나던날 헌정왕후 황보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끼고 노상에서 아들을 낳고 산통으로 사망한다.

고려 제8대 현종원문대왕 어진, 현종은 어린 잠룡시절 사천 정동의 야철지인 대산의 노곡사에서 니구산 넘어 귀룡동에 유배온 아버지와의 짧은 5년의 시간을 함께 가진다.

현종의 출생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이다. 고려사는 조선건국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강조한 측면과 유교적 관점이라는 한계위에 시대적으로 조선조에 편찬된 사서의 사관임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한편, 왕욱의 집과 청상이 된 헌정왕후가 궁에서 나와서 살았던 사가(私家)는 지척이었단다. 경종의 사망으로 자식이 없어 사가에 나온 조카인 헌정왕후를 거두어 소풍도 다니고 적적함을 달래주던 숙부와 정이 들어 난륜을 저지르고 임신이 되었다는 이야긴데 앞뒤가 안 맞다.

먼저, 왕건의 8남인 왕욱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소년기부터 장년이 된 내내, 왕족 숙청의 피비린내를 경험했다. 호족과 연관되어 현왕과 대적한 순간 목숨부지가 어려운 것이 고려 전기의 왕실이었다. 성종 역시 국가통치의 기본을 유교적 근본에서 찾았던 왕이었다. 성종 즉위 10년이 넘어도 후사가 없어 야망이 더센 천추궁의 헌애왕후의 아들인 목종에게 권력이 넘어가면 성종대에 왕권강화를 위해 개혁한 중앙직제와 지방직제는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어려운 시기였다.

김치양의 탐심에 헌애왕후의 눈이 멀어 역성혁명도 가능하리라는 분위기와, 목종의 보령이 아직 어린 때라 성종 사후 섭정이 이어지면 외척과 호족의 발호로 국정이 다시 도탄에 빠진다면, 경종때의 악몽이 다시 재현의 불가피함의 우려에서라도 성종으로서는 목종의 후계구도는 탐탁치 않았을 터다.

어린 현종이 잠룡시절 우거했던 노곡사엔 돌축대의 흔적과 야생녹차밭만이 남아 역사를 전해준다. 후에 노곡사는 왕을 모셨다고 배왕사로 그이후 배방사로 이름이 변하여 오늘에 전하고 폐사지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황주 출신의 신정왕후의 직계인 황보 씨족계의 호족이 신정왕후의 사망으로 분열되고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황보씨의 맏언니인 헌애왕후는 아들 목종을 중심으로 황주출신의 당파를 형성하게되고 성종은 이에 왕욱과 후사에 대한 논의를 통해 난륜이 아닌 탈륜으로 왕족의 대를 이으려는 계획은  아니었을까?

왕욱의 집 노비가 섶에 불을 질러 외부의 사람이 집에 들어오게 해서 불륜의 사실을 세상에 공개한다는것이 타당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헌애왕후측의 첩자였을 개연성이 더하다. 그리고 화재를 보고 위로차 군왕이  친히 방문하고 이 사건은 백일하에 드러났다기 보다 성종이 문제의 확대를 막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근친혼은 신라에 이어 고려 왕가의 관습이었고 왕족이 아닌 일반 백성에 있어 재가도 가능했던 시대였던 사정을 감안하면 비교적 자연스런 결혼문화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의 제약이 조선조처럼 과도하게 제한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후에 천추태후인 헌애왕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도 군으로서 왕궁에서 살고 왕자로서 용인받는 분위기는 지금 시대에서도 쉽게 이해되기 힘든 대목이다.

왕욱이 사수현으로 유배를 떠남에 있어 육로길이 아닌 비교적 편안한 뱃길임과  남해안의 조창이 있던 사수현에 유배를 명한것도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마음만 먹으면 개경으로의 복귀가 용이한 방법을 택함도 배려일것이다.

헌정왕후의 죽음도 전왕 왕후로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아무리 난륜이었다고 노상에서 아이를 낳아겠는가? 오히려  산모와 아이를 모두 죽이려 하다가 미수에 그쳐 헌정왕후는 죽고 구사일생으로 아이는 살아남아 황궁으로 불러 보모를 두어 기르도록 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한편, 성종은 어린 조카를 곁에 두어, 젖을 떼고 그 아비가 있는 사수현으로 보내 정동 대산의 노곡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도록 배려함도 극진한 관심과 왕의 애정이 담긴 대목이다. 왕욱이 사망하고 12살이 되던해 대량원군으로 봉하고 후에 현종으로 왕위에 올랐을때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는 모두 성종의 딸이다.

왼쪽 끝이 노고사가 있던 정동 대산이고 오른쪽 끝이 사남의 귀룡사. 왕욱은 자신의 아들을 보기위해 14km를 걸어 니구산의 고개 일명 고자등을 넘어 매일같이 아들을 만나러 갔다.(구글어스 제공)

따라서 난륜에 의한 부정한 씨앗으로의 현종이 아닌, 과거 역사속의 왕가의 혈통을 잇기 위한  탈윤으로서 사수현의 현종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종원문대왕의 즉위를 계기로 왕권은 안정되고 현종계보의 세습왕권이 대를이어 사수현은 사주(泗州)가 되고 고려조 내내 사주는 국가의 풍패지로서의 특별한 의미를 간직한 고장으로 이어 내려온다. 사천을 기억할때  고려의 풍패지로의 새로운 역사인식이 자리 잡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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