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사천=최인태 막걸리문화촌장] ‘문화사랑 새터’의 공간 이전 개소식에 막걸리 두말을 걸러서 축하하러 갔다. 그동안 남의 건물에 임대로 있다가 이제는 자기 소유의 공간으로 이전 했다니 더욱 축하할 일이다.

문화사랑 새터는 옛날 삼천포사랑청년회의 풍물 모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2004년에 창립하여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으니, 그 한결같은 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풍물’을 경상도에서는 ‘매구’, 전라도에서는 ‘풍장’, 그리고 서울이나 경기도에서는 ‘풍물’이라 불렀고, 농민들이 즐긴다고 하여 ‘농악’이라고도 했는데, 그 걸어온 길을 찾아보자.

농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이어온 예술적 가치가 큰 문화유산이다. 농사일을 즐겁게 하거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엔 문화 말살 정책으로 그 빛을 잃게 되었다. 급기야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밥그릇, 숟가락을 공출할 때 우리네 징, 꽹과리도 뺏어갈 정도였다.

해방 후에는 서구 문물에 밀려 급속히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다. 이 과정에 마을의 당집은 부서졌고, 주민들을 단결시키고 하나의 공동체로 묶던 마을굿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바람을 타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풍물이 되살아났다. 한편으론 풍물이 데모 앞잡이라며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할 때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며, 천대하던 풍물을 오히려 우리나라와 문화를 홍보하는 데 쓰기도 했다.

이러한 운명이 어쩜 우리네 전통주와 빼다 박았는지 놀랄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주세령(酒稅令)을 발표하면서 집집마다 빚었던 가양주(家釀酒)에 면허제로 세금을 부과하여 통치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총독부에서 허가하는 양조장을 앞세워 우리네 전통주를 밀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술의 원료인 쌀 사정이 좋지 않았다. 급기야 박정희 정권에서는 삼금(三禁)이라 하여 산에 나무를 못 베게 했고, 소를 못 잡게 했으며, 술을 못 빚게 했는데, 88올림픽을 하면서 우리네 전통주도 족쇄에서 풀리게 되었다.

이렇듯 비슷한 운명을 지닌 농악과 막걸리여서 그런지, 농악이 울릴 때는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아야 흥이 오른다. 그러니 농악과 막걸리는 찰떡궁합이요. 운명공동체이다. 새삼 막걸리 한잔 가득 장독대 위에 올리면서, 문화사랑 새터의 건승을 위해 두 손 모은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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