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진단에 깜짝 놀랐으나 막힌 혈관 저절로 뚫려
갑작스러운 병원 생활에 잊지 못할 감동과 감사의 순간
운 좋게 오른 귀국길 손엔 등정 사진 대신 가족사진이

[좌충우돌 ‘안데스’ 산행기] ⑧ 욕망을 버린 자리에 찾아온 행복

안데스의 최고봉(아콩카과)을 오르려던 마음은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가족’이었다.
안데스의 최고봉(아콩카과)을 오르려던 마음은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가족’이었다.

[뉴스사천=박용식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갑작스러운 심장병 진단은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자아를 잃을 만큼의 혼란을 가져왔다. 이번 산행이 실패냐 성공이냐를 논하기 전에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길 만큼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시술을 준비하면서 나는 가고 싶었던 해외의 높은 산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었다. 산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살아서 멀쩡하게 병원을 나가는 게 더 중요했다.

죽고 싶을 때보다 살고 싶을 때 자아는 더 심하게 망가진다. 생명을 이어가려는 욕망 앞에는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다. 슬리퍼가 없어서 맨발로 화장실에 갈 때, 차갑고 미끌거리는 화장실 타일이 깨끗한지 아닌지 살필 여우가 없었다. 여분의 속옷이 없어서 화장실 세면기에서 빨아 병원 침대에 널어 말렸던 빨간색 팬티. 뭐 보라면 보라지. 소변은 병실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규칙에도 불평할 수 없었다. 관상동맥 조영술의 결과에만 온갖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위로가 되어 준 병원 사람들.
어려운 시기에 위로가 되어 준 병원 사람들.

피 말리는 병원 생활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왔던 이들은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 간호사와 의사들, 그리고 병원 밖의 호스텔 주인, 등반 대행사인 인카의 직원들이었다. 낮 12시가 좀 넘으면 일제히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병문안을 온다. 아내인 거 같기도 하고 딸 같기도 한 여성들이 일제히 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나 빼고 모든 침대에 매일 같이 찾아왔지만, 나를 쓸쓸하게 여기지 않게 손짓, 발짓, 눈짓으로 힘을 줬던 같은 병실의 환자들이 고마웠다.

숙소에 보관된 노트북을 병원으로 가져와 달라는 전화기에 ‘오브 코오스 마이 브라더!(당연히 가져다줘야지!)’라고 해 주었던 호스텔 주인아저씨, 하루에 한 번씩 병문안을 오면서도 병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간 인카 직원. 이들은 내가 퇴원하여 찾아갔을 때 진정으로 놀라움과 기쁨의 포옹을 해 주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화상 입은 얼굴을 덥석 안아 주었다.

등반 대행사인 인카 직원
등반 대행사인 인카 직원

병원 간호사들과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이 퇴근한 뒤에도 서로 문자를 주고받았다. 시술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 그리고 그 이후의 관리, 가족 사항이나 키우는 반려견에 관해 나누던 이야기는, 퇴원하면 작은 파티를 하자는 계획으로까지 이어졌다. 시술 후 퇴원할 때, 동영상 시디와 처방전을 주면서 번역기를 돌려서까지 퇴원 후에 해야 할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던 젊은 의사들도 잊을 수 없다.

소통하는 게 힘들었음에도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해 안부를 물었던 대사관의 아르헨티나인 직원에게는 또박또박 감사 인사를 했다. “유어 컨트리즈 메티컬 시스템 이즈 베스트 인 더 월드. 아이 윌 낫 포겟 유어 컨트리! 아르헨티나! 땡큐 베리 머치.(=당신의 나라는 세상에서 의료 시스템이 가장 좋다. 아르헨티나를 잊지 않겠다. 대단히 고맙다.)” 기회가 되면 신문에 써서 감사의 마음을 널리 알리겠다는 말도 해 주었다. 대사관의 송태근 자문변호사와 유병희 외사관도 매우 고마운 분이었다. 누군가가 나와 병원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엄청난 위안이었다. 

관상동맥 시술을 하면 4일 더 입원한다고 하여 단단히 준비했지만, 시술 후 바로 퇴원했다. 갑작스러운 퇴원으로 간호사들과의 이별이 아쉬울 정도였다. 스텐트 삽입 없이 혈관의 상태만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막혔던 혈관이 저절로 뚫려, 스텐트를 삽입할 정도로 혈관이 좁아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4박 5일만에 비닐봉지 하나 들고 병원을 나섰다.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떠 올랐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4박 5일만에 비닐봉지 하나 들고 병원을 나섰다.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떠 올랐다.

아, 이건 또 뭔가, 바로 퇴원이라니. 비닐봉지 하나 들고 병원을 나설 때는 ‘아, 여름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떠 올랐다. 감당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 있다가 갑자기 나왔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눈 뜨지 못하는 햇살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게 했다. ‘아, 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지?’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예약해 둔 숙소도 없어서, 산으로 가기 전에 묵었던 숙소로 갈 수밖에 없었다. 숙소의 사장님은 아르헨티나 사람들 특유의 볼 키스와 함께 ‘마이 브라더!’ 하면서 맞아 주었다.

숙소에 보관된 노트북을 병원으로 가져와 달라는 전화기에 ‘오브 코오스 마이 브라더!(당연히 가져다줘야지!)’라고 해 주었던 호스텔 주인아저씨.
숙소에 보관된 노트북을 병원으로 가져와 달라는 전화기에 ‘오브 코오스 마이 브라더!(당연히 가져다줘야지!)’라고 해 주었던 호스텔 주인아저씨.

며칠 뒤 등반 대행사 인카 사무실로 짐을 찾으러 갔다. 나에게 연락했던 직원 미카엘은 낯선 동양인 아저씨를 덥석 안아 준다. 사무실 직원 모두가 ‘원더풀!’ 하면서 반갑게 맞이해 준다. 텐트를 걷고 배낭을 싸서 운송까지 해 줬기에, 운송비 300달러를 포함해 비용을 꽤 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를 떠나는 날 호스텔 주인아저씨는 하루치 숙박비는 안 받겠다고 해서 또 놀랐다. 병원비도 안 받는다고 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아르헨티나와 그 나라 사람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내가 살아갈 방향을 보여주었다.

이번 여행 혹은 등반의 성과는 안데스 등반의 4박 5일 일정보다 병원에서 보낸 4박 5일이 더 컸다. 병원 생활을 하리라고 예상할 순 없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공간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하더라도 생길 수밖에 없는 돌발상황에서 나는 운 좋게도 살아서 돌아왔다. 등정 사진 대신, 전화기 바탕 화면에 아내와 딸들의 사진을 넣어서 집으로 왔다. 남겨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안고 진주로 돌아왔다. 가고 싶었고, 또 하고 싶었던 욕망이 떠난 자리에 행복이 자리 잡는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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