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능화~학촌 부자 상봉길

부자 상봉길에서 만난 풍경. 줄사철나무가 아까시나무를 단단히 감고 올라 한 몸인 듯 보인다.
부자 상봉길에서 만난 풍경. 줄사철나무가 아까시나무를 단단히 감고 올라 한 몸인 듯 보인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마음마저 애절한 부자 상봉길에 섰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왕자 왕욱과 그 아들 왕순. 유배 생활 하는 아버지 왕욱이 아들 왕순을 애타게 보러 다닌 길이다. 부자 상봉길은 능화에서 굽은 산길을 따라 학촌을 지나 대산마을 산골짜기 배방사지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약 8km, 밋밋한 산길이다.

왕욱은 사천 와룡산 자락에 유배 와서 4년을 살았다. 고려 수도인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사천까지는 천 리가 넘게 떨어졌다. 멀리 있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다행히도 두 살이던 아들은 정동면 배방사에 내려와 지낼 수 있었다. 아이를 가엾게 여긴 성종 임금의 배려였단다. 하지만 유배를 살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애끓는 부자의 상봉은 매일매일 이어지게 되었으니. 오늘 우리 앞에는 문화유적의 길로 남았다.

쓸쓸함 담은 부자 상봉길. 부자 상봉길은 능화에서 굽은 산길을 따라 학촌을 지나 대산마을 산골짜기 배방사지까지 이어진다.
쓸쓸함 담은 부자 상봉길. 부자 상봉길은 능화에서 굽은 산길을 따라 학촌을 지나 대산마을 산골짜기 배방사지까지 이어진다.

능화마을에서 부자 상봉길을 따라 오른다. 능화저수지에는 산 그림자가 내려와 파스텔톤 추상 이미지를 그려놓았다. 그 빛바랜 기억 같은 이미지를 뒤로 한 채 숲길로 들어선다. 왕자로서 유배 생활하는 몸! 왕욱은 아들을 보러 이 길을 수없이 오갔을 테다. 매일 두어 시간 산길을 오가는 아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직 그것만이 삶의 기쁨이었고 희망이었을 게다.

고자봉 숲길에 피어난 진달래.
고자봉 숲길에 피어난 진달래.

배방사에서 아들을 보고는 골짜기를 내려와 평지길이 끝나는 곳에 고자(顧子)실(=학촌마을)이 있다. 자식을 생각하며 되돌아보는 곳! 왕욱은 여기서 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공간이 바뀌는 경계 지점인 셈이지. 이 마을을 지나면 외로운 유배지로 향하는 숲길이니 마음이 더욱 아렸을 것이다.

밤새 굴려 올린 돌은 다시 굴러떨어지고. 매일같이 언덕 위로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고달픈 신화! 찾아가는 기쁨과 돌아오는 슬픔이 뼈에 사무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리다. 고달픈 신화도 지나고 보면 잠시 잠깐, 왕욱은 유배지 능화에서 한 많은 눈을 감았다. 먼저 어머니를 떠나보낸 왕순은 6살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안종)묘터.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안종)묘터.

우여곡절 끝에 왕순이 왕위에 오르니, 아버지의 묘호를 안종이라 하였다. 숲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니 안종 묘터 팻말이 나온다. 편백이 늘어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오르니 평범한 무덤 하나 기다리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본다. 뒷산을 비추는 햇볕이 무척이나 따스하게 느껴진다.

이 묘터는 풍수에 능했던 왕욱이 직접 아들에게 일러둔 곳이라 한다. “내가 죽거든 이곳 능화봉(꽃밭등) 아래 묻어라.” 왕욱은 아들이 왕이 될 것을 믿고 있었겠지! 발복을 한 덕분일까? 아들은 역사에 빛나는 왕(고려 현종)이 되었다. 당연히 안종 능은 왕실이 있는 송도로 옮기게 되었고 여기엔 빈터만 남았으니. 마치 한 맺힌 왕자의 쓸쓸한 뒷모습 같구나! 숲길 안자락에서 갓 피어난 얼레지꽃 한 송이와 춘란의 고고한 자태를 본다.

얼레지
얼레지
춘란(보춘화)
춘란(보춘화)

길가 저만치 아까시나무 둥치에 푸른 잎들이 촘촘하다. 뭔가 싶은 호기심에 다가서 보니 아까시나무를 감고 오른 줄사철이다. 굵은 줄기가 나무와 한 몸인 듯 단단히 얽혀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면 이런 장관을 만들어 낼까? 아들을 향한 왕욱의 마음이 저러했을까? 부자 상봉길에 걸맞은 기막힌 장면을 마주쳤구나!

마삭줄
마삭줄

고개를 돌아 내려오니 고자실이 저만치 보인다. 마삭줄 덩굴 빈 깍지에 은빛 솜털을 매단 씨 하나가 매달려 있다. 까투리 안에 접힌 채 아직 날아가지 못한 씨앗도 보인다. 몇 개 꺼내서 적당한 바람에 날려보니 훨훨 잘도 날아간다. 영험한 승무, 외씨버선 춤사위처럼.

까마귀
까마귀

고자실(학촌리) 입구에 내려오니 오래된 팽나무 여러 그루 반긴다. 갑자기 주변 들판에 있던 까마귀 떼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비행을 시작한다. 몇 마리 늙은 팽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특유의 울음을 운다. 천년 전 자식을 되돌아보던 부정(父情)이 저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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