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하루라는 길을 걷습니다. 어제와는 또 다른 길입니다. 길을 가다가 바싹 마른 채 힘없이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봅니다. 땅 위의 낙엽은 바람에 스슥스슥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뒹굽니다. 마른 잎들이 누군가에, 그 무언가에 짓밟혀 으깨어지고 마침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잔해가 됩니다.

안타깝게도 눈이 멀고 귀가 먼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하며 아픔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무심히 곁을 지날 뿐입니다. 그 너머로 한 무리의 바람이 스칩니다. 검붉은 기운을 토하던 저녁 햇살이 벚나무와 은행나무 우듬지에 희미하게 머물다가 사라집니다. 슬퍼하거나 쓸쓸해 할 겨를도 없이 시간은 잰걸음으로 공간을 빠져나갑니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의 수렁에 발을 담급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가을을 만나고 있는 걸까?’ 가을을 노래한 시를 읽으면 가을은 한 편의 시가 되고, 가을을 얘기한 소설을 읽으면 가을은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습니다. 굵은 가지에서 뻗어나간 가느다란 나뭇가지, 거기에서 돋아난 좀 더 몸피가 가는 나뭇가지, 나뭇가지의 끝에서 갈려 나간 말초, 무수히 매달린 나뭇잎에 이르기까지 가을에 만난 나무는 숱한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나무는 그 사연을 나뭇가지의 옹두리로 드러냅니다. 불퉁해서 오묘해진 혹은 고통의 절규를 담았습니다. 나뭇가지는 자신의 아픔을 한층 숙성시켜 무언의 화두를 전하려 몸부림칩니다. 가을이면 나무가 산통을 겪으면서 배출하는 언어입니다.

독일 작가 모니카 마론은 소설 《슬픈 짐승》에서 거대한 공룡인 브라키오사우루스와의 관계를 통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뭇가지가 자신의 몸에 새긴 옹두리라는 언어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을에 걸맞은 색상을 찾습니다. 어떤 색이 가장 어울릴까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을 신중하게 고릅니다. 하얀 종이에 나만의 가을을 하나씩 채색합니다. 영혼까지 곁들인다면 멋을 더 내겠습니다. 가을이 주는 의미가 허물 벗듯 새롭겠습니다.

가을은 또 어떤 음색을 가지고 있을까요. 높은 음을 빠르게 연주하는 트럼펫 같을까요. 아니면 부드럽고 맑고 꿋꿋한 느낌을 주는 대금 같을까요. 그 또한 아니면 상상 밖의 낯선 집시의 선율일까요. 가을을 두고 다양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생애에 이번 가을은 이번 한 번뿐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을 읽는다는 건 가을을 벗삼아 가을의 소리를 듣고 가을의 뜻을 새기는 몸짓입니다. 채근담에는 보이는 지혜만 쫓고 보이지 않는 지혜는 쫓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애틋하게 여기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글자가 있는 책은 읽고 풀이하는데 글자가 없는 책은 읽고 풀이하지 못한다(人解讀有字書 不解讀無字書 인해독유자서 불해독무자서)” 가을은 무자서입니다.

가을의 상징성을 수확과 단풍놀이로 규정하는 건 고리타분한 입맞춤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묵은 먼지를 털고 무작정 흘려보낸 가을의 언어를 되찾는다면 생生은 풍요와 흥미를 더해 살맛을 낼 겁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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