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활짝 몸을 터뜨리던 벚꽃이 이내 꽃눈을 뿌립니다. 아담하고 귀엽게 생긴 꽃잎들이 잠시 허공을 나풀대더니 길섶을 이리저리 뒹굽니다.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생과 사는 한순간입니다. 지극히 짧은 시간 곧 75분의 1초를 가리켜 찰나라 합니다. 계절의 변화를 보면 이를 더욱 실감합니다. 인간의 삶 역시 찰나보다 짧을지언정 길 수는 없습니다.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벚나무들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지금부터가 벚나무에겐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때입니다. 수십 수백 그루의 벚나무가 꽃잎을 떠나보내고 나면 사람들의 눈길과 관심은 갑작스레 끊깁니다. 환호와 탄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눈 녹듯 사그라듭니다. 더 이상 볼거리가 없다는 냉정한 선택의 말로입니다. 하지만 벚나무는 그것이 내심 반갑고 기쁩니다. 사람이 보내는 시선의 집중은 심한 부담감을 안겨 줍니다. 소음과 매연이 그러하고 촬영 불빛이 그러합니다. 복잡함이 그러하고 인공 향수가 그러합니다. 긴장과 피로의 거죽을 벗긴 벚나무가 차분함 속에 명상을 하고 자신의 그윽함을 들여다보는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건,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의 정상성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벚꽃의 꽃말을 일러 ‘내면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 정작 벚꽃을 대하는 행위는 ‘내면의 불미스러움, 아름답지 않은 영혼’은 아닌지 성찰이 있어야겠습니다. 학생들은 4월에 치르는 시험 때문에 벚꽃 꽃말을 ‘중간고사’라 이릅니다. 현실을 반영한 기지가 돋보이지만 왠지 뒷맛이 씁쓸합니다. 6월이 되면 벚, 버찌, 앵실(櫻實)이라고 부르는 벚꽃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열매를 바라보는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은 어떨지 상상해 봅니다. 

  하얀 벚꽃이 떠난 빈자리를 노란 유채꽃이 채웁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와르르 몰려들어 난리를 칩니다. 마구 다투어 꽃밭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습니다. 찍는 자 찍히는 자 모두 즐겁습니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크고 질긴지 공기의 흐름마저 바꿉니다. 급기야 자리 잘못 잡은 유채꽃들은 자근자근 밟힙니다. 포토 존이라 하여 주변 풍경과 전망 좋은 곳에 어슬렁대던 유채꽃들은 비명횡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꽃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알아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꺾이고 짓이겨진 꽃들, 생명을 잃은 꽃들에 괘념치 않습니다. 다른 꽃들이 배경으로 잘 받쳐 주고 있으니까 걱정할 이유도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멋진 꽃들을 탐하며 추억 어린 사진만 건지면 불만이 없습니다. 쾌재입니다.    

  유채꽃은 작고 노랗습니다. 유채(油菜)란 기름을 짜는 채소라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노란 색은 밝고 환하며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유채꽃은 사람들이 까뭉개도 눈물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아픈 마음을 다독이고 추스를 겁니다. 유채꽃의 꽃말은 ‘쾌활, 명랑, 기분 전환’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짓을 일삼아도 꿋꿋이 견디며 아픔을 털어 버리고 밝게 살아가려는 유채꽃의 숭고한 마음을 보며 깨닫습니다. 꽃과 함께 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꽃들이 평화로우면 인간들 또한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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