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도 불사(不辭)한 지순한 사랑

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반가운 비가 내렸습니다. 사람도 목마른 대지도 온갖 식물도 한결같이 기다린 단비였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내린 비치고는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습니다. 급한 갈증의 고통은 해결했지만 다소 부족해 보였습니다. 모처럼 희색을 머금은 꽃과 나무를 보면서 책을 하나 펼쳤습니다. 장재인 유고시집 『그대여 여기는 지금 어디쯤인가』. 

“우리는 그곳에서 만날 것임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앞서 갔을 때 거기 놓인 흔적을 보고
그를 확인하며 당신이 사랑했던 그것에
나도 열렬히 사랑할 것입니다
나의 자취를 당신이 따라왔을 때에도
그로 인해 용기를 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밤에는 당신이 자주 보던 달과
산성의 벚꽃이 쉬고 있습니다

당신도 이제 쉬어야지요”

「사랑」이란 시의 끝머리입니다. 

1990년 9월 1일 늦은 2시가 넘어 강릉을 출발하여 동서울로 향하는 시외버스가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집중호우로 많은 비가 내리는 길을 과속으로 달리며 앞차를 추월하다가 버스는 그만 미끄러지면서 섬강으로 추락했습니다. 기사와 승객 등 모두 25명이 사망하는 참사였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마음을 에이는 사연은 홍천과 서울에서 떨어져 살며 교사 생활을 하던 주말 부부의 러브스토리였습니다. 

그날도 주말을 맞아 여느 때와 같이 부인과 아들은 남편이자 아빠를 만나러 버스를 탔다가 변을 당했던 것입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은 장재인 교사의 고백입니다. “생사의 차이가 이리도 간결한 것을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 왔습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들어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찾아 떠나려 합니다.” 삶의 고뇌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처절하게 묻어 있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떠나고 2주 뒤 그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홀연히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앞서간 그곳으로 기어코 가 버렸습니다.  

톨스토이는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고통과 헐벗음, 굶주림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이 제시한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마음과 모습이 담겨 있고, 사람에겐 미래를 보는 지혜나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아는 능력은 없으며, 사람은 결국 아가페적 사랑 따뜻한 사랑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죽음으로써 부부의 끈을 잇는 지고지순한 사랑은 신앙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하느님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깊고 진실하다는 점까지 아가페적 사랑의 영역에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에게 아가페적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자문하면서 시 「사랑」의 첫머리를 곱씹어 봅니다.

“당신은 늘 난(蘭)과 같은 모습으로 있어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게 다시 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예전의 모습은 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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