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길을 나섭니다. 잠깐이든 며칠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이웃이라면 가깝고 낯익어서 좋고, 이역만리라면 멀고 낯설어서 좋습니다. 그저 달랑 둘러메는 배낭 하나면 홀가분하고, 부족한 듯 완벽합니다. 최소한의 읽을거리와 먹을거리 그리고 갈아입을 옷 한 벌 정도는 담을 그릇이 있으면 됐습니다.

길을 걷는 것은 여행입니다. 여행은 허물벗기입니다. 허물은 사소한 욕심에서부터 화려한 재물과 막대한 권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누리고 지배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킵니다. 허물은 탐욕이 낳은 열매입니다. 길을 나서면 탐욕을 떨쳐내고 창공을 나는 자유를 얻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만의 평온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야기의 시작과 달리 어째 가벼워야 할 길의 주제가 무거워졌다는 느낌입니다. 도나캐나 어떨까요. 길 걷기가 여행이 아니면 어떻고 허물벗기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이런저런 의미나 격식 따위 다 내팽개치고 무작정 떠나는 거, 멋집니다. 그게 최상일지 모릅니다. 내키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요.

길을 걷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이채롭습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하거나 아니면 정처 없이 막연히 걷습니다. 걷다 보면 길은 평평하기도 하고 오르막이기도 하고 좁기도 합니다. 조용하기도 하고 시끌 벅적대기도 합니다. 오르막을 걷거나 주위가 잠잠하면 귀를 쫑긋 세우는 여유쯤은 하나 건져야겠습니다. 한동안 잊고 걸어왔던 덤불 속 새-겨울철 남쪽지방엔 텃새인 딱새와 참새의 삶이 재밋거립니다-의 몸놀림이 들리고, 심장을 헐떡이며 깊게 내뿜는 자신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바닷가를 스치는 길이면 쪽빛 물결의 속살이 보이고 윤슬에 눈이 일렁거립니다. 밀려온 파도가 던지는 하얀 포말의 쏴아- 하는 아우성이 먹먹한 가슴을 일깨웁니다.

한 걸음씩 발뒤꿈치를 뗄 때마다 마른 흙먼지가 입니다. 빗소리를 들은 지 꽤나 됩니다. 빗소리를 잊고 살았습니다. 겨울 날씨가 난해합니다. 날씨가 병든 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자연도 건강해야 보기 좋고 맡은 역할을 잘 풀어 나갑니다. 온갖 생명들이 예전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구태여 평등, 평화, 사랑을 외 칠 필요는 없겠습니다.

며칠 전 15시간짜리 여행을 했습니다. 그만큼 달린 적은 있어도 시종일관 걷기는 처음입니다. 걷는 도중 휴식은 갯마을 작은 책방에 들러 책을 맛보며 청유자차를 마신 거, 편의점에서 빵과 라면을 먹은 거, 어느 식당에서 칼국수를 먹은 거, 세 번이었습니다. 순수하게 걸은 시간은 모두 13시간 40분이었습니다. 9만 걸음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발바닥은 알싸했지만 일상을 대하는 느낌과 무게는 달랐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인간이 길을 내고, 또 딴 길을 찾아 낸 길을 버려도 길은 인간을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탓하지 않으며 인간을 잊지 않습니다. 길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인간이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한 아름다움이 길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소유하는 일은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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