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뉴스사천=정삼조 시인] 밤이 가장 긴 날이라는 동지(冬至)를 엊그제 지나더니 겨울다운 추위가 닥쳤다. 그동안 비교적 포근한 날씨였기에 마음을 놓고 있다 이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랬지, 겨울은 역시 추운 계절이었던 거야’라는 생각도 들고 이즈음부터 밤이 짧아진다 했으니 ‘다가오고 있는 나의 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라는 모처럼 철든 생각도 드는 때다. 

이 추위 속 우리 삶의 자세를 한번 돌이켜보자는 의미에서 지난번 본란에서 말씀드렸던 김장하 선생의 일화를 몇 개 더 소개한다. 주로 선생께서 설립하신 명신고등학교와 관련한 이야기다.

명신고등학교의 개교는 1984년 3월에 이루어졌다. 그 이듬해쯤 운동장 한 귀퉁이에 당시로서는 시설을 잘 갖춘 테니스장이 개장되었다. 재단이사장이셨던 김장하 선생도 테니스를 즐기신 까닭에 휴일이면 친지분들과 어울려 학교에서 곧잘 테니스를 치곤 하셨다. 그런데 함께 테니스를 치던 교사들 눈에 이사장님의 테니스 신발이 그 당시 활발히 보급되던 가죽 신발이 아닌 천으로 만든 제품인 것이 눈에 띄었다. 값싼 천 제품 신발을 신은 사람은 당시 테니스장에 있던 십수 명 중 오직 이사장께서 유일하셨다. 자기를 위해서는 가급적 돈을 쓰지 않는다는 자세를 실천하신 것이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과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자리에는 댁에서 가까운 곳이면 으레 자전거를 타고 오셔서 격려금을 주시고 가곤 하셨다. 교사들은 거의 자가용을 세워두고 있었던 집결지였다. 격려금의 용도는 학생들이 혹시 조금의 돈이라도 모아서 선생님 대접을 하는 일이 있을까 보아 선생님들의 간식비 또는 소풍 후의 식비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 수학여행을 가게 되면 그 책임진 교사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네곤 하셨다. 혹시 여행사에서 제공할지도 모르는 특식이나 수학여행 후의 술자리 경비를 미리 당신께서 부담하시겠다는 것이었다. 특식이 없으니 교사들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선생님들부터 수학여행 기간에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생각건대 당시로서는 명신고등학교만의 수학여행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1987년 2월에 제1회 명신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렸을 때였다. 키가 그리 크지 않으신 아주머니께서 운집한 학부형들의 뒤쪽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까치발로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한 교사의 눈에 띄었다. 이사장 부인이셨다. 그 교사가 살며시 다가가 단 위의 자리로 옮기실 것을 권하자 사모님께서는 극구 사양하시면서 자기가 여기 온 것을 어디에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다. 이윽고 졸업식이 마치자 이사장 부인께서는 조용히 버스를 타러 학교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남편의 필생사업인 학교의 첫 졸업식에 와 보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그 일을 행여 누가 보고 폐를 끼칠까 보아 조심하는 모습에서 그들 가족의 마음씀이 참으로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살다보면 부끄러운 일이 있기 마련이다. 긴긴 겨울밤, 되새기고 되새겨보며 같은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일도 다가오는 봄을 잘 맞는 일의 하나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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