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통신] 

최인태 막걸리문화촌장

[뉴스사천=최인태 막걸리문화촌장] 나이 60살(耳順)이 되어서 이전의 삶과는 다른 길을 가고자 ‘인생(人生) 이모작(二毛作)’으로 선택한 것이 ‘막걸리’ 였다.

제대로 된 술을 빚고자 부산으로 서울로 2년여에 걸쳐 ‘술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빚게 된 술은 할머니들이 밀주 단속을 피해 빚던 누룩 냄새 진한 술이 아닌 과일 향, 꽃 향이 어우러진 ‘조선의 술’ 이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옛 술’은 어떠했을까?

백제 시대 사람 ‘인번’(仁番·수수보리)은 일본에 ‘우리 술’을 전하고 ‘사케’의 신이 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신라주’ 한잔에 취하기를 간절히 원했을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했고, 고려 시대에는 ‘양온서’(良醞署)라는 술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어 체계적으로 술을 관리하였고, “증류식 소주”를 이때부터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그 집에 술이 맛있으면 주인이 길(吉)하고, 맛이 없으면 주인이 흉(凶)하다’라고 할 정도의 다양한 접대주로 집집마다 술을 빚었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이러했던 우리의 전통주가 일제강점기에 깡그리 사라졌다.

1909년에 주세법을 만들고, 1916년에는 더욱 강화된 ‘주세령’을 만들어서 자가(自家) 술 제조를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누룩인 입국(粒麴·코지)을 사용하는 양조장을 앞세워서 우리의 “술판”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그러자 밀주 단속을 피해 술의 발효를 빨리 시키고자 ‘누룩’을 많이 넣다 보니 누룩 냄새 진한 술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주세령’이 만들어진지 벌써 100년 넘었으니 아예 누룩 냄새 진한 술이 우리의 ‘전통주’인 양 알고 살아왔다.

이제 과거의 형사와 현재의 형사가 낡은 무전기로 통화하며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해 가는 드라마 〈시그널〉과 같이 우리가 찾아야 할 ‘조선의 술’ 이야기를  ‘뉴스사천’의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교신을 나누고자 《막걸리 통신》을 시작한다.

“과거를 잃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봄이 들어서는 날(立春)을 지났다.
옷깃을 여미고 내내 건강하시길 두 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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