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20×15. 2020.
무제(無題). 20×15. 2020.

대학시절, 큰 글씨를 쓰는 수업이 있었다. 밤새 먹 가는 기계를 돌려대며 큰 양동이 한가득 먹물을 채우고 한바탕 젊은 객기에 젖어 있었다. 큰 붓을 살 수 없었던 가난한 대학생이라 밀대 걸레 두 개를 붙였더니 제법 모필(毛筆)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닥가닥 밀대천은 먹물을 듬뿍 품어 흐느적거리며 참 묘한 붓 맛이 있었다. 큰 종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먹물과 얼룩이 잔뜩 묻은 발바닥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의도하지 않은 획이 그어지고 뜻밖에 느낌으로 참 묘한 희열을 느꼈었다. 훗날에도 나는 그때 감동을 잊지 못했다.

살면서 큰 붓을 들어야 할 기회가 간혹 있다. 아니다. 일부러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큰 붓으로 쓰는 퍼포먼스는 자형(字形) 못지않게 보이는 행위도 우선 되어야 한다. 선생이라서, 여자라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점잖은 사람인 척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항상 큰 붓에 대한 열망이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 전 방송국에서 특집에 큰 글씨 퍼포먼스를 넣어보고 싶다 했다. 시사적인 다큐라 힘 있는 시선이 필요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촬영 당일 그곳에는 많은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괴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며 담당 작가에게 농(弄)을 하면서도 오랫동안 얼마나 몸이 근질거렸는지 모른다. ‘정말 한 번 휘갈기며 뭐든 쓰고 싶었거든요.’

바닥에 깔린 8M 대형 천을 보는 순간 얼른 그 위로 올라서고 싶어 안달이 났다. 큰 붓이 지나갈 흰 바탕 위를 상상했다. 붓과 함께 온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음악이 흐르고 주위는 온통 조용해져 버렸다. 붓을 먹물에 듬뿍 담그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후두두두둑... 첫 붓을 놓는 순간 그동안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붓끝을 타고 내린다. 이젠 체면이란 거 없어! 그리고는 큰 획이 몸의 근육질처럼 뻗어 나갔다. 온몸을 비틀어서야 비로소 한 글자가 되었다. 몸을 수십 번 휘감은 뒤 거대한 바탕천은 더 이상 비워지지 않았다.

촬영을 마치고 준비된 식사 자리에서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다들 안쓰러워하셨고, 1시간이면 돌아갈 수 있는 집을 포기하고 호텔방을 들어서기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고는 기절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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