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원의 글씨에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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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의 글씨에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 서예가 순원 윤영미
  • 승인 2020.11.10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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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 20×15. 2020.
팽팽. 20×15. 2020.

이렇게까지 밤이 깊었는지 몰랐다.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붓을 정리하고 벼루 뚜껑을 덮고서는 밤새 밝혔던 형광등을 끈다. 어두운 복도를 더듬어 작업실 밖을 나왔다. 화려했던 다리 불빛도 차분해져 있었고, 잔잔한 바다가 달빛을 받아 투명하다. 참 좋은 동네에 산다고 혼잣말을 하고선 시동을 걸어 그곳을 천천히 빠져 나왔다.

인도가 따로 없는 2차선 도로로 접어들고 있을 때 건너편 쪽에서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로등도 거의 없는 어두운 새벽에 위험하겠다며 인상이 찌푸려졌고 순간 낯이 익은 걸음이라는 생각으로 멈칫 차를 세웠다. 차문을 열어 뒤를 돌아보니 그 노인은 내 남편의 어머니며 내 아들의 친할머니이며 나의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시다. 새벽 3시 도로 한복판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만남이었다. 

적막하기만 한 새벽 도로에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만 우렁찼다. “헐! 누구여! 뭐여! 지금 뭐하시는 거여!” 놀라움 반 반가움 반에 차에 얼른 태우고는 곧장 신문에 들어갔다. 

어디 가십니까? “수영장 간다 아이가.” 왜 이 시간에 가십니까? “지금 가서 운동장 돌다가 수영장 문 열면 들어간다.” 이 시간에 무섭지도 않습니까? “운동하러 새벽 3시부터 사람들 나오기 시작한다.” 참말입니까? “내가 왜 며느리한테 거짓말 하긋노.” 믿어도 됩니까? “아이고 믿어라 참말이다” 지금 가서 확인해도 됩니까? “확인해라 지금부터 하나씩 운동장 돌려고 나온다.” 아들은 이렇게 새벽에 나오시는 것을 압니까? “못나오게 지랄하지. 가들이 내 고집을 못 말린다.” 자식들 걱정은 안중에도 없습니까? “잠도 안 오고... 나오면 친구들도 있고. 걱정 하지마라.” 그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새벽에 인도 없는 찻길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아십니까?

다음날 새벽 3시에 차 시동을 켰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댁 대문 밖에서 비상깜박이를 켜고 서 있었다. 집안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잠시 뒤 시어머니가 나오신다. 깜짝 놀라 차 안을 들여다보신다. “새벽 3시마다 딱 차 대기해 놓으낀께네, 어무이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함 해 보이시더.” 

그 다음날 눈이 뻘겋게 충렬 된 시어머니는 차에 타시며 그러신다. “내가 니 때문에 밤에 한 숨도 못 잤다. 밤 12시에도 깨고 1시에도 깨고... 니가 걱정이 되가... 제발 안 오믄 안되겠나.” “그럴 수 있나예! 그럼 자식들은 잘 자긋소! 함 해 보입시더. 지도 살 빼는 마당인데 새벽 3시에 시어무이랑 며느리랑 같이 운동장이나 주구장창 돌아 보입시더! 저 만보걷기 인자 시어무이랑 하는깁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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