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사천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능화마을과 안종능지

귀양살이했던 고려 현종의 아버지 이야기
‘능(陵)’이 곧 ‘꽃밭등’이라 하여 ‘능화’
천년을 뛰어넘은 구씨 집안의 제사와 정성

사천시 정동면 능화마을 뒷자락에 있는 안종능지(안종의 무덤이 있던 터) 전경. 안내판 왼쪽의 작은 빗돌에 ‘안종능지’가 새겨져 있고, 주변에는 다른 무덤이 들어서 있다.
사천시 정동면 능화마을 뒷자락에 있는 안종능지(안종의 무덤이 있던 터) 전경. 안내판 왼쪽의 작은 빗돌에 ‘안종능지’가 새겨져 있고, 주변에는 다른 무덤이 들어서 있다.

[뉴스사천=공대원 시민기자] 사천을 ‘풍패지향(風沛之鄕)’이라 부르는 이유를 사천시민들은 알까. 역사에 관심이 웬만큼 있으면 모를까, 보통의 시민들이라면 ‘이게 무슨 소린가’ 할 수도 있겠다.

‘풍패지향’이란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고향이 패군(沛郡) 풍현(豊縣)이란 사실에서 만들어진 ‘황제의 고향’이란 뜻의 고사성어다. 그리고 사천시를 풍패지향의 고장으로 만든 것은 고려 8대 왕인 현종(顯宗: 이름 왕순)이다. 현종이 어린 시절에 성종(成宗)의 배려로 아버지 안종(安宗: 이름 왕욱)이 귀양을 살던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으로 내려왔던 게 계기가 됐다. 왕순은 귀양 온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는 없어서, 사천시 정동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배방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왕욱은 죽은 뒤 사남면 능화마을 뒤편에 있는 ‘능화봉’에 묻혔다.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왕순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역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안종이 묻혔던 안종능지(安宗陵址)를 찾았다.

몇 년 전에 안종능지를 찾았던 기억으로는 ‘오늘도 힘든 산행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능지 입구에 다다르니 사천시에서 안종능지로 올라가는 길을 새롭게 다듬어 놓은 것이 아닌가. 600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는 데 숨은 가빴으나, 옛 산길보다는 한층 편하다고 느꼈다.

안종능지.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무덤을 개경으로 옮기면서(1017년) 터만 남은 곳이다. 표지판의 안내문을 읽으며 천년의 세월을 더듬는 동안 마음 한편엔 씁쓸함이 일었다. 옛 안종의 무덤 자리가 다른 누군가의 무덤으로 바뀌어 있었던 탓이다. ‘하긴 후손의 발복을 위해서라면 더한 일도 하는 세상에 저 정도야’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안종능지로 온전히 못 가꾸고 있음이 아쉬웠다.

안종능지에 올라 산 아래의 멋진 풍광을 굽어보리란 생각도 허사였다. 키가 큰 나무들이 시야를 온통 가렸기 때문이다. 나처럼 ‘왕이 날 명당’을 확인하고픈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일부 나무를 정리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능화마을에서 구종효 능화귀룡문화연구회 회장을 만나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고 궁금증을 풀고 싶었지만 출타하고 없어 만나지 못했다. 그 바람은 이튿날 이뤘다. 

능화마을과 능화숲 너머로 안종능지가 있는 능화봉이 보인다.
능화마을과 능화숲 너머로 안종능지가 있는 능화봉이 보인다.

구 회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능화마을은 약 550년 전 창원(昌原) 구씨(具氏)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또, 이 마을 사람들은 안종의 능을 이장한 지 1000년이 되던 2017년부터 ‘고려 안종 추모 귀룡제’를 올리고 있다.

이야기를 듣던 중 ‘능화’라는 마을 지명의 유래에 관해 물었더니, 안종능지가 그 중심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종능지가 있는 마을 뒤쪽 골짜기 전체를 능골이라 불렀어요.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의 무덤이 있었던 곳임을 마을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알았던 것이죠. 그리고 능지가 있는 그 산등성이를 꽃밭등이라 불렀는데,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키 큰 나무는 없고 온통 진달래꽃밭이었거든. 그래서 우리는 임금의 무덤을 뜻하는 ‘능(陵)’과 꽃밭등에서 ‘화(花)’를 따와 능화마을이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능화마을에서는 마을 안쪽에 ‘터’를 조성해 ‘안종 유배지’의 복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마을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15년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 “아직 능화 구씨 종친에서 안종의 제사를 지내고 있나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종의 능을 이장한 지 천년이 지났고, 창원 구씨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것이 550여 년 되었으니, 그 시차를 극복하고 어떻게 안종의 제사를 지내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이 물음에 구 회장님은 지금도 제를 지내고 있음을 귀띔해 주었다. 특히 구씨 집안에서 시사(時祀)를 지낼 때 따로 산신제를 올린다고 했다. 이는 뭘 의미할까. 안종의 무덤이 옮겨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 능화마을에 터를 잡은 창원 구씨 사람들은 안종을 산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능화마을에서 정동면 학산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부자상봉길’이라 부른다. 이 길은 차량도 거뜬히 다닐 만큼 넓은 임도로, 그 옛날 사람이 걸어서 넘던 길은 아니다. 이에 올해부터는 ‘부자상봉옛길’을 복원하는 모양이다. 임도가 생기기 전에 정동으로 오가든 길이 임도 반대편 골짜기 건너에 있었다고 하니, 그 길에서 안종능지는 더 잘 보였을 테다. 그 옛날 풍수지리에 능했다는 왕욱의 눈에도 그 자리가 쏙 들었던 모양이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매일 10여㎞를 걸어 ‘배방사’로 갔다가 다시 귀양지로 돌아오는 길은 고단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단지 물리적 거리에만 있지는 않았을 터. 자식을 가까이 두고도 생이별해야 하는 아픔이 더 크지 않았을까. 3년을 하루같이 ‘배방사’로 다니던 왕욱(=안종)은 결국 사면받지 못하고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기 전, 평소에 봐 두었던 묘 터를 아들에게 일러주며 ‘꼭 엎어서 묻어달라(伏屍而葬)’고 했다는 게 지금도 전하는 얘기다. 그 당시 왕순(=현종)의 나이가 고작 다섯이었으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아들을 보호하던 자신의 측근에게 전한 이야기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

조카인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랑에 빠져 현종을 낳게 되고, 그로 인해 사수현으로 귀양 온 안종. 그리고 자신을 낳으며 유명을 달리해 어머니를 보지도 못한 현종은 사수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부자의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훗날 현종이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사수현을 ‘사주(泗州)’로 승격시켰으니, 사천을 풍패지향으로 부르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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