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20×15. 2020.
위로. 20×15. 2020.

책읽기를 싫어라 하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인연 줄이 엮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온통 독서모임을 하고 필사모임하며 글쓰기모임을 한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은 적지 않은 곤욕이었다. 얼굴색을 평화롭게 하고는 나도 책 좀 읽는 사람마냥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주위를 둘러보니 책 한권 엮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어느 날부터 책장에는 작가가 직접 사인한 책들이 쌓여가고 있었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항상 마저 다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다가왔다. 작가 사인을 사양한다. 다음번에 팔아먹지 못한다고 농(弄)을 한다. 그저 나날이 조금씩 스며들어가고 있다는 이 느낌을 무위자연(無爲自然) 하듯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어색하게 진주문고를 드나들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걷는다. 간혹 고민을 하곤 한다. 그러고는 슬쩍 책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책제목을 들여다본다. 영혼 없이 혼잣말로 제목을 읽고 책표지 글들을 읽어 내려간다. 이러다가 책방에 신간은 다 외워버리겠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사다 줄까. 미술 공부하는 아들에게 필요할까를 생각했다. 역사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재미나게 읽혀지겠지. 때로는 오래전 보았던 책이 옷을 갈아입고 꼽혀 있어 슬쩍 넘겨보기도 했다. 진주문고를 드나들고 한참이 지난 후에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고 싶어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힘들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책방이 되어 버렸다. 숨이 차오를 때는 사람으로 위로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가 서른에 잔치를 끝낸 최영미가 될 수도 있고, 교수직을 내려놓고 화가가 된 김정운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을 하며 글을 쓰는 김영하가 될 수도 있고,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해진 유홍준이 될 수도 있다. 책방 안에서는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을 내가 쥐고 있었다. 원하는 누군가와 밤늦게까지 의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있었다. 그 남자를 그 여자를 언제든지 내 맘대로 소환하고서 함께 공간을 채울 수 있다. 책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알게 되었다.

진주문고에 갔다. 계단을 당당하게 오르며 서가를 바라본다. 빨강머리 앤을 만나고 싶었다. 마음속에 여러 갈등이 나를 찾아 왔기 때문이다. 앤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진주문고에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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